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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하는 잡지님

나의 기자 생활이라… 그건 한마디로 잡지에 대한 위대함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는 데 말이다. 지나치게 거창하게 들릴 듯 해서, 머리에 붉은 띠 두른 투사가 생각나 입 밖에 내지 못 하고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br><br> [2008년 1월호]

UpdatedOn December 22, 2007

당신의 기자 시절은 어떠했느냐?
허허, 사나흘 전 그런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위장에 바람이 통했는지 윗배가 헛헛했다. 
이렇게 대답했다.
“성실했었다. 뭐든 남보다 먼저 시작하고 먼저 끝내고 싶어 안달난 기자였다.”고.
답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어허라, 나의 기자 생활이라…  
그건 한마디로 잡지에 대한 위대함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는 데 말이다.
지나치게 거창하게 들릴 듯 해서, 머리에 붉은 띠 두른 투사가 생각나 입 밖에 내지 못 하고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퇴근 길, 즐비한 간판들을 보면 ‘그 많은 카피들이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걸 잡지에 기획 기사로 쓰면 어떨까’했다.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를 본 날엔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마천루에 시폰 드레스를 입은 모델을 세워 화보 촬영을 하고 싶었다. ‘서울 천사의 시’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이긴 했지만. 출퇴근 길에 마주하는 서울의 우체통을 렌즈에 담아 사라지면 안 되는 절대 업적물에 대한 기사를 기획했고, TV 가요 프로그램을 보다 대기실의 부산함을 기록하고 싶어지면 방송국  대기실에 사진 작가를 대동해 진을 쳤다. 누군가는 무심히 지나쳤을 ‘소재(fabric)’의 과거와 현재를 공부하고 싶어 꼬박 2년을 비닐, 플라스틱, 종이, 면 같은 그 흔한 것들의 과거를 쫓았다. 일상의 구석구석을 점하고 있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획안들을 땅 위로 끌어내리기 위해 돋보기를 들고 바라본 세상은 그래서 나날이 새로웠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기획안에 올렸고 배당이 되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든 칼럼들이 양질의 결과물이었느냐 묻는다면 ‘물론’이라 답할 순 없다. 하지만 누구도 그 어떤 매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는 기획하지 못했던 것을 잡지 특유의 정적인 구성으로 전달하는 데 신열이 올랐던 때였다. 동영상이 아닌, 글과 사진이라는 부동의 배치에서 오는 그 은밀한 전달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지점을 찾고 있었다. 나의 칼럼을 보는 자가 ‘과연 몇 명일까?’라는 원론적인 생각에 부딪힌 적은 없었다. 사회를 개안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몇 명의 독자라도 공감하고 함께 희망하기를 소원했었다. 능력에 부쳐 그 진심을 제대로 전달 못한 적이 수없이 많았고 데스크를 밤낮으로 설득해도 결국 ‘취재 불가’라는 엄명이 떨어진 적도 많았다.
이렇게 살다보니 내가 잡지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잡지에 대한 존경이 나의 성심만큼 부풀어 올랐다.
성실하지 않았다면, 자존심도 생기지 않았을 테고, 존경이고 나발이고 없었겠지.

나는 이 존경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을 게다. 하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소리내 ‘경외하는 잡지님’이라 손 맞잡고 칭송하지 않았으므로 가끔 외롭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던 12월의 어느 날, ‘잡지, 그 위대한 영향력에 대하여(Inside the Great Magazines)’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잡지님은 1731년에 세상에 나왔고 1843년에 사진과 글이라는 씨실과 날실로 지금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는 역사를 기록한. 에이즈를, 담배의 유해성을 세상에 처음 알렸고, 동성애와 록의 세계를 들춰냈으며, 화보를 통해 지루한 현실을 잊고 환상을 꿈꾸게 했던 그 파격적인 태동을 기록한. 그리고 평이한 한 마디가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박혔다.
“잡지는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도구입니다.”
위대한 선배의 입을 통해 이 평범한 진리를 검증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환희에 흠뻑 젖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나는 어리석고도 어리석도다, 룰루랄라.    

p.s 데스크가 되니 되레 마음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도 밤만 되면 신열이 오른다. 대선 후보들의 은밀한 밤을 사진과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다가, 서울 컬렉션의 운영 보고서를 검토해보고 싶기도 했다가, 한국 패션사의 원조들을 기록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 입 밖에 차마 내지 못한 기획안들, 몇 개월 동안의 자기 옥죄임이 두려워 목울대로 꿀꺽 삼킨 것들이 태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달에도 누군가의 원고를 타박하고 누군가의 사진을 두고 맘에 안 든다며 쏘아붙였다. 이럴 때면 정말 진퇴양난의 심정이 된다. 정말 편집장은 악의 꽃이란 말인가? 반문하다가 제풀에 지쳐 잡지의 위대함이란 질긴 가락으로 씻김굿을 한다.
<아레나>는 2008년에도 매일 밤 굿거리 장단에 맞춰 널뛰는 나와, 잡지의 위대함을 찾아가는 기자들의 경쾌한 스텝을 따라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당신에게 날아갈 것이다. 위대한 잡지의 적자(嫡子)인 <아레나>는 결국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매달 한 목소리로 좀더 세게 외칠 예정이다. 기대하셔도 좋다.

연하장

하늘과 빛과 바다는 독자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아레나>의 연하장이다. 영하의 날씨를 감추고 희망의 메시지만을 내세운 기자들의 노고가 담긴 수작들로 새해축하 인사를 전한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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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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