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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배고프던 시절의 구단은 힘들어도 행복했다. 잘되라 응원하던 아버지 같은 `감독님`이 있었고, 땀흘리며 해맑게 웃는 아들 같은 선수들이 있었으니까.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난 부자지간처럼 말이다.<br><br>[2007년 11월호]

UpdatedOn October 19, 2007

Words 임성일(<베스트 일레븐> 기자) Editor 이현상 Illustration 장재훈

건강한 매력으로 넘쳐나야 마땅할 축구장이 연일 얼룩으로 몸살을 앓는다. K리그에 대한 문제 제기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라지만 번번이 그릇된 면에만 초점이 맞춰지기에 여간 속상한 게 아니다. 물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생각지 않고 ‘나’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적 발상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생각한다. 상대 선수를 그저 적으로만 여기고 심판의 판정을 무시하며 존재의 이유여야 할 팬들에 대한 존중도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남’이니까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한데 스승과 제자 사이나 다름없는 같은 팀 감독과 선수 사이도 갈수록 메말라간다. 참으로 중요한 관계인데도.

김호와 고종수
사건, 사고 소식이 많은 K리그지만 얼마 전부터 훈훈한 이야기가 들려와 미간의 주름을 다소 풀어주고 있다. 온풍의 근원지는 시민 구단의 원조 대전 시티즌이고 따뜻한 미담의 주인공은 돌아온 야인 김호 감독과 잊혀가던 앙팡테리블 고종수이다. 1990년대 한국 축구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하늘을 날다가 2000년 이후 그야말로 날개 없이 추락한 풍운아 고종수. 몇 번의 재기를 꿈꿨으나 번번이 실패하면서 ‘이제는 끝났다’는 무책임한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던 고종수가 자신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던 김호 감독과 다시 만나면서 비로소 뜻을 펼치고 있다. 허울이 좋아 사제지간이지 그저 ‘지시하는’ 사람과 ‘지시받는’ 이의 설정으로 의미가 좁아지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진정 감독과 선수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고종수는 흔한 말로 재능을 타고난 유형이다. 화려하다는 수식이 어울릴 만한 기술에 스타성도 다분했다. 대신 천재형 인물들이 보편적으로 그러하듯 평범한 흐름에 순응하지는 못했는데, 쉽게 말해 통제가 어려운 선수였다. 만약 1996년 수원의 창단 멤버로 프로 무대에 뛰어들어 김호라는 감독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은 달라졌을 공산이 크다. 타고난 자질을 고스란히, 나아가 그 이상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온전히 지도자의 몫인데 고종수에게 김호 감독이 그랬다. 그가 특별한 무언가를 가르쳐준 건 아니다. 그저 고종수가 가지고 있는 것을 펼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또 정이다.
“예전에 훈련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고종수만 안 온 겁니다. 선배들도 화가 났죠. 누군가가 고종수를 찾으러 갔는데 방에서 자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친구는 머리만 대면 잡니다. 잡생각 없이 충분히 쉬어 빠르게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운동선수에게 큰 장점이죠.”
김호 감독이 전해준 수원 시절의 에피소드다. 다수의 사람들이 ‘버릇없는’ 행동으로 여길 장면에서 김호 감독은 선수 고종수의 장점을 부각한 것이다.
“고종수는 사실 희생양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종수가 나태하고 방만했기에 ‘망가졌다’고 하지만 가만두지 않고 쥐고 흔들어 ‘망가뜨린’ 점도 무시할 수 없지요. 한국 축구 특유의 시스템에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창 잘나갈 때,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시기에 지나치게 혹사당해서 수렁으로 떨어진 것이죠. 타고난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인내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습니다.”
김호 감독은 올여름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공개적으로 고종수에 대한 신뢰를 피력했다. 뉴스메이커를 부각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선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겠다는 계산이 더 커 보이는 발언이었다.
“아직 고종수의 몸 상태가 완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10~20분이라도 꾸준히 출전시킬 것입니다. 특히 홈경기에는 무조건 내보낼 겁니다.”
김호 감독의 의지는 고스란히 실천으로 옮겨졌고 현재 고종수는 홈과 원정 경기를 가리지 않고 있으며 90분 풀타임을 소화할 정도로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자신을 알아주는 참된 지도자 아래 방황에서 돌아온 고종수가 다시금 예의 빛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나이로도 고참급이 됐으나 김호 감독은 일부러 고종수에게 의자 나르기 같은 허드렛일을 시킨다. 그래도 고종수의 표정은 밝다. 심리적으로도 안정이 됐다는 뜻이다.
“그동안 많이 헤맸죠. 하지만 이제 다시 길을 찾았습니다.”
짧지만 다부진 고종수의 의지다. 은사 김호 감독의 힘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거창한 말은 아닐지언정, 확실히 고종수는 김호 감독을 다시 만나면서 변하고 있다.

김학범과 김두현
지도자와 선수 관계가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성남의 김두현이다. 자타 공인, 현재 K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드필더지만 사실 김두현은 한때 버림받은 선수였다. 애초 김두현을 발탁한 인물 역시 김호 감독이다. 통진종고에 재학 중이던 김두현의 잠재력을 알아본 김호 감독은 2001년 그를 수원으로 불러들이며 일찌감치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지금이야 고교생, 심지어 중학생 나이의 선수들도 프로로 전향하지만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직은 미완이었으나 김두현은 지도자의 믿음 아래 차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는데 아쉽게 2003년을 끝으로 김호 감독이 팀을 떠나면서 명암이 갈렸다. 2004년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차범근 감독은 김두현의 스타일을 썩 선호하지 않았고 차츰 필드를 밟는 일이 줄어들었다. 급기야 2005년, 사실상 ‘방출’의 수순을 밟고 성남으로 옮기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것이 새옹지마였다. 허리 라인 운영을 중시하는 성남 김학범 감독 휘하에 합류한 김두현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가 돼 필드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주문하는 것은 없습니다. 워낙 알아서 잘하는 선수니까요.”
김호 감독이 고종수를 믿었듯, 김학범 감독도 김두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새로운 플레이메이커를 장착한 성남은 2006년 K리그 정상을 차지했고 김두현은 그해 시즌 MVP에 올랐다. 불과 2년 전 누군가에게 팽당했던 인물이 대한민국 프로 축구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이다. K리그 용병들을 만나서 토종 선수 중 가장 빼어난 플레이어를 물었을 때 십중팔구는 김두현을 꼽는다. 앞서 말했듯 그저 ‘지시하는’ 사람과 ‘지시받는’ 관계로 치부할 사이가 아닌 것이다.

퍼거슨의 아이들
외국에도 사례는 충분하다. 이 시대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좋은 예가 되겠다. 1986년 11월 ‘The Reds’의 수장으로 부임한 이래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퍼거슨 감독은 프리미어리그 우승 9회, FA컵 5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1회 우승 등 화려한 나날을 보냈고 또 보내고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그가 비단길을 걸었던 것은 아닌데 퍼거슨이 처음으로 리그 정상에 오른 것은 지휘봉을 잡은 지 6년이 지난 1992~93 시즌이다. 제법 긴 무관의 세월이었으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쯤 되는 명가에서 어찌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퍼거슨은 자신만의 철학으로 팀을 만들기 시작했다. 퍼거슨 감독 배포의 정수는 자신의 안목으로 발탁, 유소년 클럽에서 성장시킨 새싹들을 꾸준하게 A팀으로 불러들이며 판을 새로 짰다는 점이다. 라이언 긱스(1990), 데이비드 베컴(1991), 게리 네빌(1992), 폴 스콜스(1993) 등 소위 ‘퍼거슨의 아이들’로 불리는 선수들인데 베컴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오직 붉은 군단에서만 활약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당대 최고의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주역이다.
“그는 놀랍고 또 놀라운 선수입니다. 소년의 모습으로 믿을 수 없는 재능을 펼쳐 보이던 예전부터 34세의 나이로 여전한 기량을 선보이는 지금까지, 라이언 긱스는 늘 경이로운 대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변함없을 것입니다.”
13세의 꼬마 라이언 긱스에게, 그것도 라이벌 클럽 맨체스터시티 유스팀에 있던 ‘남의 자식’을 레드 데블스로 불러들인 퍼거슨의 끈질긴 구애는 유명한 일화다. 당시 긱스를 유혹(?)하면서 퍼거슨 감독은 “3년 뒤 프로 무대에서 뛸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실제로 긱스는 17세 생일에 프로 계약을 체결했고 이듬 시즌 데뷔전을 치렀다. 만약 꼬마 긱스가 퍼거슨이라는 감독을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맨체스터시티에 그냥 남았다면 과연 ‘마법사’라는 닉네임이 가능했을까?
베컴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200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징과도 같던 베컴의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이적은 전 세계적인 이슈였다. 떠난 이유가 바로 감독과의 불화였는데 퍼거슨은 슈퍼스타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어지간한 지도자라면 불가능했을 결정이다. 결과적으로 베컴이 떠났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베컴은? 굳이 실력이 형편없어져서 현재 미국 프로 리그(LA갤럭시)에 있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레알 마드리드의 베컴’은 적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베컴’에 미치지 못했다. 다 컸다고 생각하고 스승에게 등을 돌렸는데 아직 배울 것이 더 있었던 격이라고 표현하면 무리일까.

둘은 하나를 이긴다
사실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은 많다. 다만 일정 수준을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에 따라 소위 선수의 레벨이 달라지는데 이때 감독의 역할이 지대하다. 명지대를 졸업했을 때 그 어떤 구단도 불러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일본 J리그(교토 퍼플상가)로 건너갔던 ‘그저 그런’ 선수 박지성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을 만나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이 된 오늘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투박하고 거칠게 뛰기만 했던 김남일을 대한민국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만든 것 역시 명장 히딩크의 공이 크다.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하나가 둘을 능가하기는 벅차다. 혼자 뛰는 선수가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는 이를 앞서기 힘들다. 감독을 만나면, 잘 만나면 선수는 분명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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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임성일(<베스트 일레븐> 기자)
Editor 이현상
Illustration 장재훈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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