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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 있는 산문집

16세기 프랑스 문학가 미셸 드 몽테뉴는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뒤 `에세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게 <수상록>이다. 바야흐로 5백 년이 흘렀다. 너도나도 에세이(산문)를 쓰는 세상이라 양서를 고르기가 무척 어렵다. 출판 평론가 최성일이 군계일학을 일러줬다.<br><br>[2007년 11월호]

UpdatedOn October 19, 2007

Words 최성일(출판평론가) Editor 이민정 Photography 박원태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그러자 장자가 이야기했다. “‘쓸모없음’(無用)을 알아야만 함께 ‘쓸모 있음(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법이네, 땅은 정말로 넓고 큰 것이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사람이 쓸모를 느끼는 것은 단지 자신의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라네. 그렇다면 발이 닿는 부분만을 남겨두고 그 주변을 황천, 저 깊은 곳까지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이 발이 닿고 있는 부분이 쓸모가 있겠는가?”
철학자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 인용된 ‘장자, 외물’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자는 자신의 철학이 쓸모없다고 조롱받자 ‘쓸모가 있음’은 ‘쓸모가 없음’을 알아야만 논의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볍게 대꾸하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역제의가 받아들여져서다. 에디터는 쓸데‘없는’ 산문집에 대한 내 생각을 듣고 싶어 했다. 서점에 쏟아져 나오는 숱한 산문집, 그중에도 연예인을 앞세운 여행 에세이나 사진집 등은 ‘산문’이라는 장르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느냐는 거였다. 뭐가 진정성 있는 산문인지도 덧붙여 달라 했다. 생각 끝에 나는 반대로 쓸데 ‘있는’ 산문집을 다루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연예인을 내세운 책이 쓸데없다고 여기진 않지만 내 취향이 아닐 따름일뿐더러 그런 책까지 읽고 글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들이 직접 썼는지의 여부도 퍽 의심스러워서다. 남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냥 밝히면 되는데 대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남이 써준 책을 제 것인 양 펴내는 건 쓸데없기 전에 몹시 ‘나쁘다’!
정용주 시인의 <나는 숲속의 게으름뱅이>는 아내가 먼저 읽고 칭찬한 책이다. 내가 선정을 맡고 있는 한 출판 단체의 ‘이달의 책’으로도 뽑혔다. 문학 분야에서 이런 종류의 산문집을 그달의 책으로 선정한 것은 드문 일이다. 문학 선정위원들은 심심찮게 출간되는 야생의 삶 체험기 가운데 이 책에 담긴 진정성을 높이 샀다. 글머리부터 조짐이 좋다. 떡잎이 파랗다. “나는 약초꾼도 아니고 요가 수행을 하는 사람도 아니며, 망초꽃 우거진 숲길을 산책하며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색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바위 밑에 평석을 깔고 정화수 떠놓고 치악산 신령님께 정기를 부어달라고 기도하는 박수는 더더욱 아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일하고 싶으면 조금 하고 싫으면 말고 하면서, 최소한의 것으로 굶어 죽지 않으면서 내 멋대로 자연 속에서 뒹구는 게으른 생활인이다.” 그러고는 이 책은 “놀이로서의 생활을 실험하는 어느 산쟁이의 일기”라며 시작하는 글을 마무리 짓는다.
2003년 7월 무작정 산에 들어온 정용주는 원주 치악산 기슭에 살고 있다. 그가 터를 잡은 곳은 해발 700미터의 제법 깊은 산속이다. 찻길에서 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골짜기 둘을 건너야 겨우 닿을 수 있다. 그의 산속 생활이라는 게 이렇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특별히 시간을 정해 밥을 먹지 않는다. 여름 한낮엔 점심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헷갈린다. 톱질은 느려도 팔뚝이 굵어지고 가슴 근육이 불끈 솟는다. 아무런 생각 없이 볕드는 흙벽에 기대어 시간을 흘려보내고, 봄비를 하루 종일 바라보기만 한다. 여기에 역지사지의 깨우침.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불만거리가 되는 경우가 있고”, “누구에겐 하찮은 것이 다른 누구에겐 소중한 것일 수 있다.” 고독에 관한 성찰까지. “고독감을 몸부림치며 피해갈 필요도 없지만 고독감에 도취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마주쳐야 하는 인간 내면의 진실일 뿐이다.”
산속 생활에 이력이 붙으면서 치렁치렁한 긴 머리는 거의 도사님 행색이다. 도사를 자처하진 않으나 그를 도사님으로 잘못 본 길손에겐 장난기가 발동한다. 흰 종이에다 볼펜으로 갈겨 쓴 가짜 부적을 건네며 펴보면 효험이 떨어진다고 강조하고, 아들의 운세를 넘겨짚어준 할머니가 다시 올까 싶어 내달에는 충청도 계룡산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전혀 계획에 없는 일정을 흘린다. 이렇듯 괜찮은 산문집에는 웃음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언 땅이 풀리고 얼어붙은 파란색의 호스가 쿨럭 기침을 하며 가늘게 녹은 얼음을 뱉어낸다. 이 산속에도 봄이 왔다는 첫 신호”처럼 말이다.
여행 사진가 신미식의 포토 에세이 <나는 사진쟁이다>는 여행기와 사진집의 성격을 아우르고 있다. 여행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지가 약하거니와 사진 찍는 방법을 알려줄 뜻도 없어 보인다. 표지 타이틀대로 그저 사진 산문집일 뿐이다.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6개국과 호주 대륙 아래에 있는 섬, 뉴칼레도니아에서 찍은 사진을 짧은 글과 함께 엮었다. ‘감동이 오기 전에 셔터를 누르지 마라’라는 여행 사진가 본인의 기율을 충실히 따라서일까. 책에 실린 사진들은 하나같이 뛰어나다. 사진은 기계일 뿐인 카메라로 찍었는데, 여행 사진가의 극진함과 열정이 그걸 허락해서일까. 쓸데없는 사진은 한 컷도 찾아보기 어렵다.
“난 눈으로 본 이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하고자 가슴속에 깊이깊이 담아두었다.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 가슴으로 남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이 전부 가슴에 담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령 담겼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는 풍광이 있는 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나에겐 이곳이 그런 곳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난다 해도 내 가슴속에 담겨진 이곳의 하늘과 이곳의 바람, 그리고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은 바로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다. 그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자연환경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찬미한다. 아니, 그는 남미 대륙에 홀딱 빠진 것처럼 보인다.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과 티티카카 호수로의 여정은 멀고 험하지만 만족과 휴식을 모르는 그도 플라밍고 무리 앞에서 눈물을 떨구고 만다. 콜카캐니언(Colca Canyon, 페루 남부 아레키파 북쪽에 있는 협곡)에서 만난 콘도르(페루를 대표하는 새)에게 3시간을 바친다.
전문 여행 사진가는 여행을 부추긴다. 글보다 사진이 더 강하게 유혹한다. 무지개 걸린 바오밥 나무(298~299쪽)의 대단한 볼거리가 눈에 선하다. 책 출간에 임박해 신문 여행 면(<경향신문> 2007년 6월 28일자)에 실린 걸 보고 먼저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 달 만에 마다가스카르를 다시 찾을 정도는 아니어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런 훌륭한 사진 여행기나 여행 사진집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최성각은 소설가다. 지금은 환경 운동가의 직함이 더 잘 어울리지만. 그는 1990년대 초반 서울시와 에너지관리공단이 추진하던 ‘상계소각장’ 건설 저지 운동에 주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환경 운동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을 통해 아예 환경 운동가로 살고 있다. 서울과 강원 춘천시 서면의 툇골에 들어앉은 ‘풀꽃평화연구소’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달려라, 냇물아>는 환경을 주제로 그가 10여 년간 쓴 글 수백 편 가운데 일부를 추려 묶은 책. 먼저 <녹생평론> 발행인인 김종철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 산문집은 작가 최성각이 그의 본업인 소설을 쓰는 틈틈이, 한가로운 시간에 쓴 그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가 본업을 제쳐두고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쓴 글들이다. 지난 15년 넘게 ‘환경판’의 뛰어난 글쟁이로서 새로운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온 최성각에게 있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이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자유로운 산문이야말로 작가로서의 그의 가장 중심적인 업적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내 등판은 거위 놀이터다(소제목)”는 그런 ‘작품’ 중 하나다. 그가 거위와 동거하게 된 연유는 여름날 시골 연구소 땅에 출몰하는 뱀 때문이었다. 산을 끼고 개울에 면한 곳이라 뱀이 나타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만 뱀을 만날 때마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고향 친구들과 뒤늦게 만든 인터넷 카페에 뱀 이야기를 올렸더니, “거위를 키우면 뱀이 안 나타난다”는 조언을 듣는다. 하지만 정작 거위를 구할 길이 막막하다. 거위가 거의 멸종됐다는 소리마저 들었다. 수소문 끝에 춘천역 가는 길 굴다리 근처 부화장에서 거위 새끼 두 마리를 구입하는데 성공한다. 거위의 구매 여부를 확인하고자 오전 7시 정각에 전화를 하라고 요구한 부화장 주인은 어린 거위를 거칠게 다룬다. 이를 보다 못한 최성각은 부아를 터트린다. “아저씨, 내가 아저씨 모가지를 잡고 한번 휘둘러볼까요? 좋나, 안 좋나!”
이른바 ‘황우석 사태’의 와중 노성일 씨의 폭로가 있기 전, 그는 어느 인터넷 매체 사이트에서 이런 댓글을 접했다고 한다. “포스터의 말을 빌리자면, 배아줄기 세포 연구는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다.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는 감각, 그 감각 속에 시간 또한 있는 것으로, 시간만이 창출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존경과 경배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쓸데 있는 산문집 세 권은 다 읽을 만하고(한 권은 볼만도 하고), 권할 만하다. 아, 어떤 산문집이 좋은 책이냐고? 답은 하나다. 당신을 웃게 하고, 당신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 물론 인간이 불완전하듯 완벽한 책도 없다. 세 권 모두 내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하나씩 있다. 그러나 어쩌랴, 내 불만거리가 누구에겐 얼마든지 호감을 줄 수 있으니 속으로 삭이고 말아야지. 쓸데 있음을 실용성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세 권의 쓸데 있음도 장담 못하겠다. 진지한 산문일수록 실용성은 떨어지거늘, 당신에게 쓸모 있을지 내 어찌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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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최성일
Words 이민정
Photography 박원태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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