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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채의 언어

호텔 룸이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내려왔다. 회색 카펫을 하얗게 태웠다. 긴 그림자가 움직이다 멈췄고, 정은채가 내게 물었다. 꿈이 뭐냐고.

UpdatedOn December 12, 2013

흰색 라펠이 있는 검은색 코트는 크리스찬 디올 제품.

언제 지겨움을 느끼나?
사람들이 질리게 굴 때.

기자들이 제일 귀찮게 굴 텐데.
그런 사람도 있고. 난 기계 같은 것, 빨리빨리 돌아가는 것들에 질린다.

그런데 어떻게 연예계에 있지?
프레임 안에 있는 게 좋다. 다른 인물로 살 수 있으니까. 그 순간은 재밌다.

정말 다른 인물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존재로 존재할 순 없지. 그냥 그 중간쯤을 찾는 것 같다. 캐릭터 안에서 연기할 때 최대한 자유로울 수 있다.

정은채는 신비롭다. 촬영할 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을 안 해서 그런 것 같다.
고수해야 할까?

본인은 뭐가 더 좋은데?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굳이 살면서 많이 말해야 할 게 있을까? 친구들 사이에서도 수다 떠는 타입은 아니다.
다른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그럼, 은채 씨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얘기할까?
가끔 인터뷰를 할 때면, 이 사람이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까? 의아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느낄 때면 대답을 잘 안 한다.
내 말들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까? 누굴 만나면 그냥 앉아서 빈 공간을 느끼는 게 진짜인 것 같다.

흰색 니트 톱과 스커트는 모두 셀린느 제품.

은채 씨가 신비로운 건, 과거가 거의 안 알려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매우 평범한데. 영국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했고, 중1 때부터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굉장히 엄한 기숙사 여학교였다.
학창 시절 억압당하고, 경직된 규율 속에서 대학 가기 전까지 5년 정도 보냈다. 외국 생활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내 경우는 정반대였다.

한국의 학교는 자유롭다. 자고 싶으면 자고, 가기 싫으면 안 가고….
하하. 기자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 내 또래일 것 같은데.

서른. 어려 보이지?
응.

부럽나?
아니. 기자들과 나이가 비슷해져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 기자들은 엄청 어른이었고, 어른들이 내게 무슨 질문을 할까? 했었는데….



은채 씨는 기자들에게 뭘 물어보고 싶나?
다른 세계에 사는 분들과 이야기하는 게 재밌더라. 패션지 기자들은 삶이 한 달 단위로 나뉠 것 같다. 원래 패션지 기자가 꿈이었나?

아니. 그럼 은채 씨는 배우가 꿈이었나?
지금까지는. 배우로 사는 게 제일 좋다. 다른 일을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재미난 일을 찾으면 많을 것 같은데, 직업으로 생각하면 별로 없고. 배우로서 작품을 하며 사는 게 시간도 굉장히 빨리 지나가는 것 같고. 그 과정 속에는 복합적인 느림의 미학도 있어서 좋다. 하나를 반복적으로 하면 금방 싫증나지만.

쳇바퀴만 굴리면 당연히 지겹지.
회사 다니는 친구들은 힘들 것 같다. 우리는 한 작품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가 한 단위니까. 굉장히 다르다.
반복적이지 않고, 작품의 주기가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언제 이렇게 계절이 지났는지, 나이를 먹었는지 생각하지 않아서 좋다.

검은색 터틀넥 니트와 캐멀색 가죽 플리츠 스커트 모두
셀린느 제품.

반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세월 가는 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겠지.

살아가는 것은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은채 씨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음악과 연기를 하니까.
무슨 일을 하건 선택해야 하는데, 매 순간 선택의 기준이 뭘까? 생각한다. 어찌 보면 현실성이 부족하거나, 대책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계획적으로 살지 않으니까. 목표를 세워두고, 큰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희생하는 것도 있더라.
나는 그런 것과 맞지 않는 사람 같다. 굉장히 더디고, 제자리걸음 하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서 미세하게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도 있고 그런 게 좋다. 함께 있는 사람이 진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하다.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과 달리 나는 그냥 한마음으로 하거든.

열의가 없어 보일 수 있겠지.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적이 없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주로 한다.

이제는 1백 세 시대니까. 우린 오래 살 테고, 우리의 취향, 선호하는 것은 변할 거다. 때에 따라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맞다.
기로에 서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 그럼 만사형통이더라.
우린 늘 최고의 것만 생각하니까. 그래서 부족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근데 그게 인간이니까.

홍상수 감독의 뮤즈로만 알려지는 것 같다. 아쉬울 때도 있을까?
엄청난 영광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또 다른 역할을 하면 다르게 봐주겠지. 누군가의 무엇무엇.
이런 수식어는 사람들의 말장난일 뿐이다. 그러니 굳이 지루함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예쁘다는 소리도 지겹나?
글쎄. 난 여성스러운 스타일은 아니라서.

스스로 중성적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성격이 좀 그렇다.

참한데?
하하하, 나는 참하다는 단어랑 되게 안 어울리는데. 하지만 참하다면 받아들여야지. 사람마다 시선이 다른 것 같다.
처음에는 사람들 말에 솔깃했는데,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니까 다 다르더라. 결국엔 내 생각, 내 방식대로 믿고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언어로 이렇게. 그래야 다채로워질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을 정의 내릴 수 없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투, 표정, 행동 등을 답습한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 더 복합적인 존재가 되는 거고.
또 본능적으로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는 것 같다. 어려서는 별 생각 없이 어울려 다녔는데, 나중에 보면 비슷한 것처럼.
사람들은 편한 것, 익숙한 걸 좋아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보수적인 것 같다.
그런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보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면 그렇지 않겠지. 가족, 학교, 직장 대부분 보수적이잖아.
홀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것 같다.

쉴 때는 뭐하나?
가끔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시간 맞추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스케줄이 들쑥날쑥하니까.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건 어렵다.
갈수록 홀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럼, 온라인 게임을 해라.
게임 전혀 안 하거든. 어렸을 때는 은근히 승부 근성이 있어서 뭐든 잘하려고 했다. 이제는 승부욕이라고는 전혀 없다.
경쟁이 정말 싫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묻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묻어만 가도 반은 성공인데.

어쨌든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다. 의외로 남자들한테는 별로….
하하하. 나 다시 태어나야 할까봐. 왜 여성스럽지 않은지 이제 알겠네.

대신 멋있잖아. 은채 씨 보고, 한국의 샬롯 갱스부르라고 하더라. 기타 치고, 연기하고. 분위기도 비슷하고. 또 남자들이 어려워하고.
남녀가 함께 있는 집단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다. 중·고등학교는 여자들만 있었고, 오히려 친한 친구들은 남자가 많다.
남자들은 자기 얘길 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 자기중심적이라고 할까? 좀 단순하기도 한 게 재밌더라고.

남자친구는 많지만, 대시하는 남자는 없지?
아, 많다고 하고 싶다….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일이 바빠서 그렇지만, 새로운 모임에 나갈 기회도 없고, 또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러니까 온라인 게임 하자.
하하하. 근데, 기자님은 글 쓰는 걸 왜 좋아하지?

말을 잘 못하거든. 동의하는 건가?
동감하는 거다.

Editor: 조진혁
photography: 김태선
STYLIST: 박세준
HAIR: 김선미(고원)
MAKE-UP: 문혜은(고원)
COOPERATION: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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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CREDIT INFO

Editor 조진혁
Photography 김태선
Stylist 박세준
Hair 김선미(고원)
Make-up 문혜은(고원)
Cooperation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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