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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스 레터 11월호

벌써 일 년 ll

On October 24, 2013

지극히 흥미로우면서도 고단했던 지난 일 년을 숨 가쁘게 질주하는 동안 한쪽 끝에서 바흐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줬다면,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책(정확히는 책의 무더기)이 버티고 서 있었을 것이다. 책상 주변에 책 무더기를 (열심히 읽었다기보다 그저) 쌓아놓은 덕분에 가끔 숨고르기를 하며 넘길 수 있었던 지난 일 년.















지극히 흥미로우면서도 고단했던 지난 일 년을 숨 가쁘게 질주하는 동안 한쪽 끝에서 바흐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줬다면,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책(정확히는 책의 무더기)이 버티고 서 있었을 것이다. 책상 주변에 책 무더기를 (열심히 읽었다기보다 그저) 쌓아놓은 덕분에 가끔 숨고르기를 하며 넘길 수 있었던 지난 일 년.

긴급한 마감 업무를 잠깐 멈추고 책상 주변에 널려 있는 책들을 잠시 일별해본다. 그러고 보면, 영미식 글쓰기와는 다른, 프랑스식 글쓰기라는 게 분명 있(어 보인)다. 먼저 자타가 공인하는 영미권 대표 작가들을 한 번 쓱 훑어보자. 마크 트웨인으로부터 시작된 유장한 미국식 위트의 최정점에 놓여 있는 ‘말빨 영감’ 보네거트.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등짝이 근질거려 저절로 몸을 배배 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흡인력이 강한) 문체와 호흡을 가진 빌 브라이슨. 남자의 ‘찌질’한 측면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닉 혼비. 그리고 최근 영미권 문단의 총아(寵兒)로 떠오른 더글러스 케네디까지. 영미권 글쓰기를 대표하는 명료함과 위트는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았던 위대한 리얼리스트 조지 오웰과 잭 런던에게도 그 자취가 남아 있을 정도로 유장한 전통을 자랑한다. 이런 특유의 글쓰기 방식은 영미권에서 발간되는 매거진(특히 남성 매거진)에도 깊숙이 배어 있다.

반면, 프랑스식 글쓰기는 좀 더 겉멋(?)이 배어 있다. 철학, 또는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폭넓은 지적 수준을 마구 뽐내는(?) 글쓰기가 대세라는 뜻이다. 새들은 왜 페루에 가서 죽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은 못하겠지만… 그 유려한 문체와 깊이 있는 지식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로맹 가리(아, 진 세버그…. 작가가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사로잡을 수 있는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살림을 합치면서 상대방의 이 책은 버려야 한다 절대 불가하다, 라며 피터지게 싸우는(혼수의 규모로 피터지게 싸우는 한국의 시선에서 봤을 때 ‘쟤들 뭐하니?’라는 멘트가 저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서재 결혼시키기>의 앤 페디먼. 두말할 나위 없는 미셸 투르니에. 그리고 프랑스식 글쓰기의 정점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크로스토프 바타유. 그리고 피에르 바야르….

이쯤에서 피에르 바야르에서 딱 멈춰보자. 그의 가장 흥미로운 책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한국이라면 장정일식으로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으로 구분할 테지만 대담무쌍하게도 ‘읽지 않았어도 이 책은 내 지식이야!’라고 호기롭게 외치는 이 지식인 작가. 그만의 책 구분 방식인 UB(Unknown Book), SB(Skimmed Book), HB(Heard Book), FB(Forgotten Book)를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들을 대상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비틀어보자면.

머리가 핑핑 도는 마감 와중에도 단숨에 완독한 책
<차일드 44> <28> <소문의 여자> <매스커레이드 호텔> <64>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내가 잠들기 전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살인자의 기억법>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 <위대한 개츠비> <다, 그림이다>, 스티븐 킹 <11/22/63> <긍정의 배신>
쯧쯧. 그러고 보니 깊이 사고하기 귀찮아 호흡이 빠르거나 흥미로운 코드가 담뿍 담긴 책만 대부분 단숨에 완독했구나. 물론 이 책들은 모두 훌륭한 저작들이다.

절반 정도 읽었는데 다시 펴들 여유가 없어 애만 태우는 책
<밤이 선생이다> <저스트 키즈> <프랑스적인 삶>, 레이먼드 카버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로맹 가리 <레이디 L>, 피에르 바야르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여름의 묘약> <럼 다이어리>, 진중권 <아이콘> <생각의 지도> <서양미술사> <미학에세이>
그러고 보니 유독 진중권의 책이 많다. 지극히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꽤 어려운 테제들이 많아 잠시 쉼을 주려 했다가 다시 집어들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듯.

몇 페이지 들춰보다 그냥 접어버린 책
<젊은 도시, 오래된 성> <김탁환의 원고지> <인생학교-온전한 정신으로 사는 법> <위로의 디자인> <펭귄 북디자인> <한문서사의 영토>
유감스럽다.

표지만 보고 있어도 흐뭇한 책
발터 벤야민 <부르주아의 꿈>, 필립 K. 딕 <높은 성의 사내>, 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이면의 도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피에르 바야르 <예상표절> <네 얼굴을 찾으라> <슬픈 열대> <타블로이드 전쟁>,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잭 케루악 <길 위에서> <화가의 얼굴, 자화상> <지문> <밀어> <달에 울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때론 책을 그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적 허영심 탓에 서둘러 사들였지만 첫 장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먼지만 수북이 쌓이고 있는 책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김수영을 위하여> <게 가공선> <과거 침묵시키기>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위대한 바다-지중해 2만년의 문화사> <헤로도토스와의 여행> <1960년을 묻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필립 로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중세의 가을> <비엔나 1900년>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 <시인 백석>,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내 게으른 성정이 제대로 폭로되고 말았다.

새삼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참 많다. 더도 말고 딱 일주일만 모든 업무를 잠시 내려놓은 채 무념무상 상태로 책만 줄기차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진다면…. 물론, 이룰 수 없는 꿈이 가장 달콤하다는 것은 체험해보지 않고서도 능히 알 수 있으렷다.

지극히 흥미로우면서도 고단했던 지난 일 년을 숨 가쁘게 질주하는 동안 한쪽 끝에서 바흐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줬다면,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책(정확히는 책의 무더기)이 버티고 서 있었을 것이다. 책상 주변에 책 무더기를 (열심히 읽었다기보다 그저) 쌓아놓은 덕분에 가끔 숨고르기를 하며 넘길 수 있었던 지난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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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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