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LIFE MORE+

술과 소설- 좀비

맛과 향이 술을 이루는 전부가 아니다. 이달 <아레나>는 다섯 명의 소설가에게 술이 환기하는 정서, 환영, 일상에 대해 짧은 소설을 써보자고 제의했다.

UpdatedOn July 29, 2013

좀비 사냥꾼이 마시는 법
Liquor : Jägermeister

불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도 좀비들은 다섯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내가 삐걱거리는 바 안에 들어서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놈이 고개를 쳐들었다.
“더우니까 빨리 끝내자.”
놈이 내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는 동안 허리에 묶어두었던 손도끼를 풀어냈다. 입에서 쇳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놈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내 복사뼈를 물려고 허우적대는 좀비의 턱을 손도끼로 박살내버리자 모두의 걱정스러운 만류가 떠올랐다.
“도시로 돌아간다니, 미친 짓이야. 거긴 좀비들 소굴이라고.”
“이대로 죽고 싶진 않거든요.”

사실 그 말은 이대로 살고 싶진 않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몰려드는 좀비를 피해 교외 농가에서 진을 치며 하루하루 요깃거리를 생각하는 나날들. 생존의 무게에 눌려 숨소리도 내지 못했던 기나긴 불면의 밤들. 거대 빌딩 사이의 톱니바퀴로 소모될 때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 바에 마지막 한 병을 두고 왔다.’

사냥을 하고 돌아오던 리더가 좀비 떼의 습격을 받아 죽기 직전 내게 보내온 메시지였다. 가끔 운이 좋을 때면 우린 좀비들을 해치우고 난 뒤 보드카나 위스키를 마시며 짤막한 파티를 열곤 했다. 절망이 세팅된 세계에서의 작은 반란이자 즐거움이었다. 생사의 고락을 함께했기에 그가 생략한 술 이름이 ‘예거마이스터’란 것과 용량은 700ml란 것도 직감할 수 있었다.

턱이 잘려 나간 좀비의 피 냄새를 맡자 바 여기저기에 구겨져 있던 나머지 네 놈이 몸을 일으켰다. 한꺼번에 달려들면 좀 힘들겠는데.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테이블을 박차고 뛰어올라 손도끼를 휘둘렀다. 지긋지긋한 좀비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날 포기하게 만들지 못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난 한때 인간이었고, 그다음엔 좀비였지만 지금은 그냥 몸뚱이가 된 녀석들 가운데 서 있었다.
온몸이 땀과 피로 범벅이 됐다. 목덜미와 팔을 쓸어보니 다행히 물린 곳은 없었다. 마지막 좀비의 무거운 몸덩이를 이미 싸늘해진 바텐더 옆쪽으로 밀어버리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검은색 예거프리저. 예거마이스터의 아이스 콜드 샷 전용 냉동고. 문을 열자 영하 15℃의 시원한 바람이 메마른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원래는 다섯 병도 넘게 포용할 수 있는 공간에, 뜯지 않은 예거마이스터 한 병이 도발적인 아가씨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손을 뻗어 사각형 병을 감싸 쥐자 서늘한 병 표면에 솜털이 곤두섰다. 그냥 대충 마시면 되잖아. 바에 전기가 들어오는 순간 좀비들도 몰려들 거라고. 끝까지 내 머리를 파고든 유혹의 목소리였다. 물론 포기하면 그럴 수 있겠지. 좀비 세상이 된 마당에 얼려 먹든 태워 먹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난 이제 소중한 뭔가를 포기하는 데는 진력이 나 있었다. 좀비들에게 안락한 집을 빼앗기고, 친구들을 빼앗겼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한 병의 즐거움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아이스 콜드 샷으로. 스트레이트 잔에.

손도끼를 놓고 병을 따자 하얀색 냉기운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놓았던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따르자 특유의 달짝지근하면서도 청량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그동안 피 냄새에만 길들여졌던 후각이 탈출구를 찾은 느낌이다. 지금껏 포기하지 않았던 나에게 건배.

첫 잔을 들이켜자 캐러멜을 오래 달인 듯한 묵직한 달콤함이 혀를 적셨다. 그다음엔 알로에 향과 함께 쌉싸래한 뒷맛이 느껴졌다. 영하 15℃에서 얼린 술은 마치 얼음 속에서 타오르는 화염 같았다. 입술에 닿을 땐 차갑지만 몸속에서는 내 마른 심장에 커다란 불씨를 피우듯 뜨거워졌다. 좀비들과의 싸움으로 지친 혈관들이 툭툭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이 완벽하다면 안주도 필요 없다.

난 바의 창문들 틈 사이로 미약하게 새어 들어오는 새벽빛을 바라봤다. 잔을 비우고 새로 채울 때마다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이 파티를 함께했을 친구들. 난 그들이 찾아올 때마다 건배를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취기가 올라온다. 여덟 잔인가, 아홉 잔쯤 비웠을 때 유리창을 박살내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복도 쪽 창문이 깨져 있었고,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좀비들이 서로 들어오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깨진 창문 뒤의 실루엣을 보니 스무 마리는 넘을 것 같다.

“그래. 오늘 파티는 끝이라 이거지.”
이제 곧 먼동이 틀 것이고 그럼 좀비들도 현격히 느려진다. 그때까지만 살아남으면 된다. 난 예거마이스터의 뚜껑을 닫고 반 정도 남아 찰랑이는 술병을 다시 쿨러에 넣어두었다. 과연 여기서 살아남아 이걸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남은 병을 다 비울 때까지 절대 죽어선 안 되지.”
몸을 일으키자 좀비들이 바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냥꾼은 포기하는 순간 사냥감이 된다. 난, 절대로 사냥당하지 않을 것이다.

임태운(소설가)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2013년 08월호

MOST POPULAR

  • 1
    모유 수유와 럭셔리
  • 2
    코로나 때 어떻게 하셨어요?
  • 3
    과감함과 귀여움
  • 4
    문수진, “내가 듣고 부르고 싶은 음악으로 앨범을 만들고 싶었어요.”
  • 5
    BEFORE SUNSET

RELATED STORIES

  • MEN's LIFE

    바다 사나이

    파도에 맞서고, 바위에서 뛰어내리고, 낚싯줄을 감고, 돛을 쥐는 바다 사나이들. 바다는 변치 않는다고 말했다.

  • MEN's LIFE

    'SNOW CAMPERS' 로버트 톰슨

    그들이 혹한의 설원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스노 캠핑 좀 한다는 세계 각국의 남자들에게 물었다. 눈 덮인 산맥은 혹독하지만 경이롭고, 설원은 침묵하는 아름다움이라 한다. 그리하여 설원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물으니, 그곳에는 고독한 자신이 있었다고 답했다. 대자연의 겨울을 거울 삼은 스노 캠퍼들이 말하는 자유와 고독이다.

  • MEN's LIFE

    'SNOW CAMPERS' 드루 심스

    그들이 혹한의 설원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스노 캠핑 좀 한다는 세계 각국의 남자들에게 물었다. 눈 덮인 산맥은 혹독하지만 경이롭고, 설원은 침묵하는 아름다움이라 한다. 그리하여 설원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물으니, 그곳에는 고독한 자신이 있었다고 답했다. 대자연의 겨울을 거울 삼은 스노 캠퍼들이 말하는 자유와 고독이다.

  • MEN's LIFE

    건강한 두피를 위하여

    두피가 빨갛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굴 피부보다 얇다는 두피가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 당장 피부과 전문의에게 달려가 SOS를 청했다.

  • MEN's LIFE

    'SNOW CAMPERS' 파블로 칼보

    그들이 혹한의 설원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스노 캠핑 좀 한다는 세계 각국의 남자들에게 물었다. 눈 덮인 산맥은 혹독하지만 경이롭고, 설원은 침묵하는 아름다움이라 한다. 그리하여 설원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물으니, 그곳에는 고독한 자신이 있었다고 답했다. 대자연의 겨울을 거울 삼은 스노 캠퍼들이 말하는 자유와 고독이다.

MORE FROM ARENA

  • FASHION

    모두를 위한 옷

    편안한 라이프웨어를 추구하는 유니클로와 독보적인 아웃도어 DNA를 지닌 화이트 마운티니어링이 만났다. 이를 기념해 화이트 마운티니어링의 디자이너 아이자와 요스케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두 브랜드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 FASHION

    White Out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다이아몬드의 변함없는 미학.

  • REPORTS

    진구가 웃는다

    갈증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진구는 웃었다. “흐르는 대로 흘러갈 겁니다. 이제껏 그래 온 것처럼.”

  • REPORTS

    유인영 + 이원근

    유인영과 이원근은 영화에서 만났다. <여교사>는 그들을 이어준 가교였다. 둘은 영화를 통해 선후배로 묶였다. 그 인연의 매듭은 촬영한 지금까지 단단하다. 살갑지 못한 후배였던 유인영은 어느새 선배가 돼 이원근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낯가림 심한 후배 이원근은 선배가 내민 손이 반가웠다. 낯선 두 사람 사이엔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를 사이에 두고, 손 내밀고 화답한다. 영화가 미치는 다양한 영향 중 하나.

  • FILM

    세븐틴 조슈아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신의 모습은?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