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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스레터 6월호

그리하여 나와 파리II

바야흐로 나의 대학 시절은 나태와 권태, 딱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1990년대 초반 대학에 입학한 이른바‘X세대’다. 파릇파릇한 캠퍼스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 당시는, 험난했던 1980년대를 관통하며 청춘을 하얗게 불태웠던 ‘386 선배’들은 이미 힘이 쭉 빠진 상태였다. 어쩌면 그 시절을 ‘진공의 시대’라 규정할 수도 있겠다. 사회참여에 대한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던 학생운동 세대와 취업에 대한 갈망으로 도서관으로 침잠해야 했던 IMF 세대 사이에 딱 낀 세대. 빛깔도 존재감도 더없이 약했던 나의 1990년대.

UpdatedOn May 22, 2013

아레나 옴므 플러스 편집장 박지호









바야흐로 나의 대학 시절은 나태와 권태, 딱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1990년대 초반 대학에 입학한 이른바‘X세대’다. (아, 방금 마흔두 살의 서태지가 열여섯 연하인 배우 이은성과 재혼한다는 기사가 떴다. 파릇했던 청춘이 20년간 끊임없이 곰삭아가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파릇파릇한 캠퍼스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 당시는, 험난했던 1980년대를 관통하며 청춘을 하얗게 불태웠던 ‘386 선배’들은 이미 힘이 쭉 빠진 상태였다. 어쩌면 그 시절을 ‘진공의 시대’라 규정할 수도 있겠다. 사회참여에 대한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던 학생운동 세대와 취업에 대한 갈망으로 도서관으로 침잠해야 했던 IMF 세대 사이에 딱 낀 세대. 빛깔도 존재감도 더없이 약했던 나의 1990년대.

그래도 나는, ‘다이내믹 코리아’ 5천 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여유와 나태가 허용되었던 호우시절(好雨時節)이라 자족한다. 그랬다. 당시 우리는 누구나 게을렀고, 권태로웠으며, 방탕했다. ‘저항의 음악 록’이라는 테제를 강력 신봉한 한 녀석은 드럭과 롤링홀에서 시작한 ‘(라이브) 클럽 죽돌이’ 인생을 지금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으며,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 깊이 매혹되었던 또 다른 녀석은 여자와 섹스를 할 때에도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신기(神技)를 선보이곤 했다(물론 전해들은 얘기라 진실 여부는 투명에 가깝지 않다). 당시 ‘문화과학’이라는 기묘한 학문에 빠져든 또 다른 녀석은 현실문화연구에서 출판된 <회사가면 죽는다>라는 책을 고이고이 가슴에 품은 채, 장맛비가 반지하방 창문을 끊임없이 들치며 잠 못 들게 하는 여름 방학 내내 에반게리온과 공각기동대와 아키라와… 그리고 길고양이 여덟 마리에게 꼬박꼬박 참치 캔을 따주며 동거하다어느날 문득 종적을 감췄다. 완벽하게. 마치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속 ‘나’와 ‘쥐’처럼 빈 맥주 캔과 땅콩 껍질로 바의 바닥을 가득 채울만큼 권태로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루지하면서도 기묘한 공기가 주변을 떠돌았던, 그런 시대였던 건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나. 내가 매혹되었던 건 결국 파리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른바 ‘파리 키드’였다.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와 고종석의 <바리에떼>에서 ‘톨레랑스’라는 용어를 발견한 이래, 프랑스 아니 파리라는 콘셉트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펼쳐 든 관련 학술 서적들은 등장하는 용어마저 시(詩)적이었다. 앙시앵레짐, 테르미도르, 어떻게 국가이름은 라 마르세예즈이며, 레미제라블의 후예들이 묻힌 국립묘지의 이름마저도 페르 라세즈일까. 현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파리 68혁명’을 설명한 책 표지에는 바리케이드 너머 더없이 패셔너블한 카고 팬츠와 티셔츠 차림의 대학생 커플이 얼굴을 가린 스카프를 잠시 내린 채 깊숙한 키스에 빠져 있는 매그넘의 사진 컷이 오롯이 박혀 있었다. 심지어 구호마저도 얼마나 우아한지. ‘상상력에게 권력을’ ‘여기가 아닌 다른 생(生)에’. 나중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에서 재확인한 바 있는 1960년대의 파리. 에바 그린의 황홀하면서도 애절한 입술 그 너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관장을 정부가 임의로 해임했다는 이유만으로 거리로 나섰던 장 르누아르, 로베르 브레송, 에릭 로메로, 알랭 레네, 롤랑 바르트. 그리고 수만 명의 핏기 없는, 앳된 청년들.그리고 무수한 시네필들. 전쟁 직전, 프랑스와 독일의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줄앤짐>의 잔 모로. <분노하라>의 스테판 에셀의 부모를 모티브로 했다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그 영화. 그리고 장 뤽 고다르. 한국의 한 젊은 배우도 모방했던 그 유명한 멘트 “뉴욕 헤럴드 트리뷴!” 또한 마치 팝아트처럼 내 머릿속을 이미지로 뒤덮었던 프랑스의 무수한 철학자들. 미셸 푸코의 그 유명한 테제 판옵티콘. ‘구별짓기’라는 콘셉트로 흐리멍덩했던 내 머릿속을 쾌청하게 뒤흔들었던 피에르 부르디외. 탈주와 변신과 도주하는 유목민과 천 개의 고원을 가슴 속에 아로새겼던 질 들뢰즈. 그리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감독 김응수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라는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던, 평생 우울증과 정신분열에 시달린 끝에 아내를 교살한 뒤 정신병원에 십여 년간 갇혀 지내며 자신의 가장 내밀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삶을 최후의 저작으로 완성한, 프랑스 지성계에서 ‘무덤에서 돌아온 이 시대 최고의 철학자’라는 칭호를 받은 루이 알튀세르. 그렇게 권태와 추상 속에 갇힌 채 별 볼일 없는 20대를 그저 흘려보내기만 하던 나는 드디어 파리와 직접 조우하게 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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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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