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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윤석화 뇌종양 투병 중 첫 인터뷰, 나답게 살다 윤석화답게 죽겠다

“저, 암 말고는 건강해요.” 뇌종양 수술을 받은 지 9개월, 배우 윤석화는 씩씩했다. 그녀는 ‘윤석화다운 것’을 말하며 항암 치료를 거부했다. 투병 중 인터뷰에도 명불허전, 배우는 배우였다.

On August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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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연극배우 윤석화는 무대 밖 인생도 극적이다. 갑자기 찾아온 뇌종양이 죽음을 대면하게 만들더니 어느 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병상에 있는 동안 많은 지인이 방문해 반세기 동안 무대를 빛내온 이 불후의 배우가 극적으로 회복되기를 기원했다. 그들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민간요법 효력인지, 의지가 뇌를 관통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의식이 돌아온 뒤 몸을 일으켜 외출을 시작한 지 두 달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환자인 아픈 사람을 만나는 일은 힘들다. 마음도 힘들고, 시간을 맞추고 여건을 갖추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하필 필자도 다리 수술을 받은 직후라 몇 차례의 만남은 느리고 천천히 이어졌다.

자매들

8월 11일, 배우 손숙의 연기 인생 60년을 기념하는 공연 <토카타>의 연습실을 방문했다. 8월 19일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에서 <토카타>가 개막되기 8일 전이었다. 윤석화는 지인의 맛집에서 도시락 20여 개를 맞춰 연습실을 찾았다. 원로 배우 박정자까지 합류해 대배우 3명이 한자리에 모인 의미 있는 날이었다. 무대 옆에서 나눈 이들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손숙 너무 다행이다, 이렇게 나아져서…. 나도 다쳐서 3개월 동안 누워 있었잖아. 윤석화 아프면 힘들어. 그런데 여기 오니까 무대 올라가고 싶다. 손숙 자리 줄 테니 할래? 마지막에 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역할이 있어. 아무 대사 없이. 윤석화 좋아 좋아.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된단 말이지? 아무 옷이든 상관없고? 박정자 나도 그 역할 하루 예약해놨다. 앉아만 있는 역, 좋지. 윤석화 이렇게 언니들 보니까 <햄릿>을 다시 하는 것 같아. 만난 김에 대사 한번 해보고 싶다(2022년 7~8월 이들은 <햄릿>에 함께 출연해 나이순으로 배우 1, 2, 3 역할을 했었다. 이후 윤석화의 투병이 시작됐으니 이날의 만남은 특별한 감회를 주었을 것이다). 박정자 다 까먹었지. 어떻게 기억해.

손숙의 연습 무대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아무 분장도 치장도 없이 맨몸, 맨얼굴로 무대 위에 앉고 눕고 서로를 어루만졌다. 손숙 데뷔 60주년 기념 공연의 제목은 ‘토카타(Toccata)’. 이탈리아어로 ‘접촉하다. 만지다’란 뜻이다. 무대장치라곤 풀 언덕밖에 없는 단촐한 배경에서 한 늙은 반려견을 떠나보내고, 애틋한 추억을 회상하며 독백하는 내용이다. 살면서 접촉해온 모든 인연, 물건, 장소, 시간…. 오래된 것들을 회상하고 추억하는 대목에서 여인은 말한다.

“그 많은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는데, 오래된 몸은 왜 이리 익숙하지 않을까.”
오래된 배우 윤석화가 오래된 선배 손숙의 무릎 위에 머리를 뉘며 말했다. “언니들 제발 아프지 마. 아픈 건 나 하나로 족해.”

세월에 익어 오래된 몸들이 엉키며 농담과 덕담들이 오갔다. 몇 차례 눈물이 슬쩍슬쩍 비쳤지만 잘들 절제했다. 한국 연극의 역사적 배우들. 저마다 색깔이 다른 세 배우는 마치 친자매들 같았다. 박정자가 말했다. “친자매보다 더 가깝지, 우리는.”

병상일지

지난해 8월 박정자, 손숙, 윤석화가 함께한 연극 <햄릿> 공연을 마친 뒤 윤석화는 영국 출장지에서 쓰러졌다. 갑자기 발생한 일이지만 징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왼쪽 팔이 약해지며 힘을 쓸 수 없었다. 쑥뜸 치료를 받던 중 “아무래도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받곤 했다. 차일피일 미루다 영국에서 결정타를 맞은 셈이다. 암은 늘 허를 찌른다.

남편과 후배가 현지 병원의 의견을 듣고 빠르게 대처했다. 에어앰뷸런스를 수배하고 런던에서 서울로 급송, 연세세브란스병원으로 직행, 뇌에서 적잖은 크기의 종양 발견, 최대한 빠른 수술 집도, 20시간이 넘는 수술 등 모든 게 긴박하게 이어졌다. 위험수위를 알 수 있는 흐름이다. 그녀는 중환자실에서 나와 의식을 회복한 한참 후에야 이 모든 과정을 알게 됐다. 죽음을 대면할 시점임을 깨달았고, 힘든 결정을 해야 했다. 중요한 순간 앞의 담대한 결단, 윤석화의 전매특허다. 의사를 설득했다.

“나를 내보내주세요. 이렇게 병원에서 삶을 연명하는 것은 나답지 않아요. 3개월을 살든, 6개월을 살든 중요하지 않아요. 하루를 살아도 괜찮으니 윤석화답게 살다 윤석화답게 죽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연극배우 윤석화,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진 거 아니에요. 당신이 내 팬이었다니… 도와주리라 믿어요.”

주치의 강석구 박사는 젊은 시절 윤석화의 연극 <아가씨와 건달들>을 여덟 번이나 봤다고 했다. ‘찐 팬’이라 할 수 있으니 얘기가 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통했다. 퇴원 후 집으로 이동했다. 서울 삼청동 한옥으로 귀가하던 날, 강 박사에게 ‘엄지척’했다. “고맙습니다. 윤석화 팬 자격이 있네요.”

생과 사

귀가한 후 그녀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들어섰다. 본인은 감수한 바이지만 지켜보는 사람들, 간병하는 이들에겐 살얼음판이었다. 의식불명일 때는 물론 병원에 다닐 때도 혼자 걷지 못해 업혀서 계단을 오가는 등 상황은 점점 나빠져 갔다. 병문안을 간 지인들은 그녀의 상태를 본 뒤 어두운 낯빛으로 돌아섰다. 연극계 선후배, 교회 신자, 문화계 예술인, 정치인들까지. 지인들이 전해준 맛난 음식과 과일 등이 냉장고에 쌓였지만 먹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권유를 시작으로 암 환자에게는 주변의 유혹이 많았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가 운영하던 공연예술 잡지 <객석>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형옥 대표는 “움직이지 못해 침대에 누워 있는 와중에도 휴대폰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했다. 자식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 죽음이 찾아와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그녀도 가족과의 이별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을 꼽으라면 우리 아이들을 키운 거예요. 참으로 기뻤고, 좋은 엄마가 되도록 아이들이 만들어준 것에 대해서도 너무너무 감사해요. 여름방학을 맞아 아이들이 한국에 올 때, 공항으로 마중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반전

많은 암 환자가 그렇듯 그녀도 여러 민간요법을 알아보고 시도했다. 하지만 극적 반응이 오거나 위안을 주는 것은 없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항암제는 먹을 때와 안 먹을 때를 한두 달 정도 비교한 뒤 버리기로 했다. 항암제는 식욕을 떨어뜨렸고, 밥을 못 먹으니 기력이 더 약해졌다. 대부분의 시간은 누워 지냈다. 쓰러져 잠들고, 아침이면 눈을 뜨기 힘든 악순환 속에서도 3가지를 꼭 실천했다. 독일산 PM주스를 마시는 것과 쑥뜸을 받는 것. 그리고 기도. 그래도 이만큼 살아내고 있는 건 그 3가지 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몸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움직이고 조금씩 걸으며 회복되는 기운을 느꼈다. 퇴원한 지 2개월 만에 병원을 찾아 종합검사를 받았을 때 의사가 말했다. “모든 것이 좋아졌네요. 참 다행이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미안하네요. 이렇게 회복하기까지 병원에서 해준 게 없어서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묻는다면 기도와 PM주스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하루 종일 PM주스를 끼고 다니며 정말 열심히 마신다(PM주스는 몸에 유익한 채소와 과일을 칵테일한 가공 음료다. 주로 여성들이 다이어트용으로 마시는데 윤석화에게는 항암 효과로 나타난 것 같다).

몸을 회복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하루에 한 번씩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밥 먹기다. 일단 연극계에서 잘 살아왔다는 걸 증빙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로는 박정자, 손숙이고, 아래로는 뮤지컬의 디바 최정원과 전수경, 김미혜(샘컴퍼니 대표)를 꼽을 수 있다. 나이를 떠나 ‘찐친’들이고 자랑스러운 배우들이다. 기적을 이룬 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도 생겼다. 울릉도다. 이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나 (늙어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란 명분으로) 고스톱을 쳤고, 일본 홋카이도 여행을 하며 즐거움을 나눴던 셋(최정원, 전수경, 김미혜)과 조만간 울릉도행 크루즈에 오를 날이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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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멋있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 자세의 문제예요.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사유할 수 있는 한 권의 책,
한 편의 시를 보는 여유를 가지면 멋지게 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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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연극을 이끈 세 배우 박정자·손숙·윤석화. 친자매 이상의 ‘찐자매’라는 것이 표정에 드러난다.

한국의 현대연극을 이끈 세 배우 박정자·손숙·윤석화. 친자매 이상의 ‘찐자매’라는 것이 표정에 드러난다.

한옥

윤석화의 집은 서울 북촌 한옥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작은 정원이 딸린 조그마한 한옥에 2개의 방이 있고,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서재와 작은방을 들이고 그랜드피아노가 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층의 작은 거실은 병실이나 다름없다. 침대가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그 위에 반쯤 눕고 반쯤 앉은 자세로 식사하는 배우가 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세상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순백의 미모가 빛나던 배우는 앞니 빠진 할머니로 바뀌었다. 틀니를 뺀 상태에서는 영락없는 할머니지만 굳이 가리려 하지 않는다. 삶이 만든 자연스러움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이, 윤석화. 소박한 한옥을 닮았다.

미닫이문 앞에는 이해인 수녀가 보낸 ‘쾌유를 기도하는’ 난들이 놓여 있다. 1980년대 연극계의 히로인으로 윤석화가 이름을 날릴 때 문학계에서는 이해인 수녀의 시들이 세상을 휩쓸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와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왠지 모르게 닮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했다. 이제 두 사람은 모두 늙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암이란 벗을 사귀게 됐다. 부산 광안리 성 베네딕도수녀원을 찾아가 이해인 수녀를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윤석화가 말했다.

“참으로 정다운 시절이었다우. 시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그러면서 생각을 키우고, 내가 누구인가를 함구하며 살았달까. 암에 대해서도 그래요. 기왕에 찾아온 것, 물리치고 이기려고 닦달하기보다는 서로 잘해보자고 다독이지. 어쩌겠냐고요. 이것도 생각해보면 다 감사한 일 아니겠수? 이런 건 테스 형한테 물어도 답이 안 나와. 내가 나답게 해결해야지.”

병중 농담, 여유 있는 모습이 멋지다. 한술 더 뜬다.
“그런데 왜 뇌냔 말이지. 이렇게 거대한 건 아인슈타인 같은 거물들이 걸리는 거 아닌가?”

배우는 사람, 배우

지하 1층(언덕바지 집이라서 길가의 1층이기도 하다) 작은 서재. 양쪽 벽에는 오래된 사진, 오래된 포스터 속 윤석화들이 붙어 있고 그 사이에 윤석화가 앉았다. 작품 속 윤석화들에게 실재의 윤석화가 갇힌 듯하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유난히 마음에 남는 작품을 꼽아보니 주로 역사 속 실존 인물을 다룬 인물극이 많았다.


<마스터 클래스> 너무너무 좋은 작품이었죠. 배우로서 많이 배웠고, 예술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게 했던 작품이에요(작품 속 주인공 마리아 칼라스를 자신과 가장 닮은 배우로 여기는 듯하다. 치열한 연기도 그렇지만 삶의 굴곡과 희로애락, 생각의 DNA가 닮은 듯하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나이트 마더> 소통 못 하는 엄마 이야기죠. ‘나이트 마더’는 ‘밤 엄마’가 아니라 ‘잘 자요 엄마’라는 뜻이에요. 철없는 엄마 ‘제시’ 역할을 할 때 스스로 사색하는 철학자, 시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런 제 모습을 좋아했어요. 이 작품 이후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첫 레슨이 된 작품이에요.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공주, 아픈 역사지만 알아야죠. 뉴욕에 덕혜옹주의 여동생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찾게 돼요. 정말 멋진 여성으로 살고 있더군요. 중남미 여성들, 할렘가 여성들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전설적 여성인데, 생각이 멋지고 활동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분, 그러니까 내 동생이죠?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란 제목으로 언젠가 화보집을 만들고 싶어요.


인물 연기의 정점은 <명성황후>로 이어지는데 그녀는 한마디로 “She was real smart”라고 표현했다. 윤석화는 아프고, 슬프고, 그래서 아름다운 인생들에게 다채로운 레슨을 받았다고 무대 인생을 정의했다.

“배우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누군가 나를 가리켜 멋있는 여자다,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평가한다면 바로 연극 때문이고, 다른 세상, 다른 사람들을 통해 배운 것들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멋있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문제, 자세의 문제예요.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사유할 수 있는 한 권의 책, 한 편의 시를 보는 여유를 가지면 멋지게 살 수 있을 겁니다.”

자유

‘윤석화 장르’란 말이 있다. “윤석화처럼 하는 배우는 윤석화밖에 없다”는 말도 있다. 연극인으로 살아온 자긍심은 국내 최고다. 무대를 통해 담대함을 키웠고, 그것이 인생 후반전에 겪은 많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해줬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살기, 무엇이 되고자 애쓰지 않기, 담대하게 나답게…. 윤석화 장르다.
늘 갖고 있는 화두는 ‘내가 어떤 한 사람에게라도 선이 되고 있을까’이다. 구질구질하지 않게 살기, 나다움을 잃지 않기, 아픈 사람들에게는 더욱 하고 싶은 말이다.

“마음의 아픔이든 육체적 병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프다는 것에 갇히지 마라. 우리 엄마에게도 배웠죠. 엄마는 난소암으로 4개월 판정을 받았지만 그 후 16년을 살다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교회에서 만난 이들이 ‘권사님,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하면 ‘난 암 말고는 건강해요’라고 답했죠. 아픈데 좀 쉬라고 하면 ‘유별 떨지 마라. 일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으면 감사한 거지,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이유가 뭐냐’고 말했어요.”
그녀도 지금 암 빼고는 건강하다.

엄마

윤석화의 어머니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 피를 이어받은 딸도 그렇게 살았고, 그래서 죽는 날까지 도전하고 모험하며 살게 됐다. 그중 엄마로서의 도전이 인생에서 가장 빛났다고 생각한다. 병상에서조차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은 잘 키웠다”고 할 정도다.

“저는 다른 애들과 비교하지 않았고, 내 눈높이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늘 믿어줬고 기다려줬어요.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든 걸 탁 놔버리고 싶은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늘 끝까지 믿어주고 호응해줬어요. 왜냐하면 엄마니까요.”

좌절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Why?”, “What?” 아이에게서 이 말이 나오면서 엄마들은 힘들어진다. 속에서 훅 올라오지만 그것을 참아내야 했다. 때로는 남매를 비교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올 때도 있었다. 잘 키웠다는 말의 절반은 잘 참아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결국 엄마에게 돌아온다. 사춘기를 거치고 어떠어떠한 성숙기를 지나면 엄마를 찾아오게 된다. 그녀가 그랬듯이 수민, 수화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윤석화 곁에 아이들이 와 있다. “아이들이 무엇이 되느냐는 관심이 없어요. 뭐라도 하며 살겠죠. 물론 엄마로서 불안불안하지만 그냥 믿어요. 우리나라는 지금 친구가 협력 상대가 아니라 경쟁 상대인 게 불행이에요. 아, 정말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세상의 엄마들에게 말하고 싶은 한 가지는 제발, 자신의 아이를 ‘무엇으로 만들려’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라고 악센트 강한 영어로 말했다. “What is Dream, What is Hope, Vision?”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리던 몸이 각을 세울 때 눈빛은 강렬했다. 그녀는 살아났고,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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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3장

윤석화의 인생을 3막 3장으로 정리하면 지금 3막 어딘가에 와 있다. 1막은 성장기부터 연극계 데뷔기, 2막은 <신의 아그네스> 이후 유명세를 탄, 명실상부 정점을 달리는 시기가 되겠다. 3막은 김석기 씨와 결혼하고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는 과정부터 시작된 인생 후반전인데 전반전보다 후반전의 고난이 훨씬 심해 보였다.

인생 1막 2~3장에 해당하는 청년기, CM송의 귀재로 불리며 가수 김도향·이장희·윤형주 등과 일하던 때는 국내에서 혼자 살던 시기다. 가족들이 (학교 문제 때문에) 막내만 남겨놓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그 시기를 즐겁고 발랄하게 재능을 뽐내며 보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을 생존을 위한 밥벌이였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번 돈 6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언니의 결혼 자금에 보태기도 했다. 뉴욕에서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만큼 열심히 일하며 공부했는데 때때로 공부가 뭔가 싶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인기 가도를 달릴 때도 돈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고 “씰데없이” 사색과 철학적 사유가 많았는데 그것 역시 윤석화다움을 만든 자양분이 됐다. 결혼 후 달라진 것은 시련과 고난, 아픔을 이겨내는 법을 혹독하게 겪은 것. 그녀는 “핑크빛은 무슨,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기억으로 유지하는 것”이란 말로 대신했다. 윤석화의 연기에 무게를 심어준 자양분은 고난과 사색이 아닐까?

CREDIT INFO

임동준(칼럼니스트)
사진
김정선
헤어·메이크업
유선미
2023년 09월호

2023년 09월호

임동준(칼럼니스트)
사진
김정선
헤어·메이크업
유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