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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⑫

도스토옙스키의 작가 지망생 애인들

On May 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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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무덤이 있는 넵스키 수도원 입구(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무덤이 있는 넵스키 수도원 입구(상트페테르부르크).

 

수슬로바는 도스토옙스키 문학 속 강한 여성의 원형

『도스토옙스키 평전』의 저자 E. H. 카는 도스토옙스키를 충동성이 강하며 어린아이 같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수슬로바는 능수능란한 말괄량이로 표현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 이야기했지만 도스토옙스키와 로자노프의 말을 들어보면 수슬로바에게 말괄량이란 표현은 너무 애교스럽고 너그러운 표현인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이 든 지능적이고 교활한 말괄량이는 무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비평가들은 『도박꾼』의 폴리나는 물론이고, 『백치』의 나스타시야,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그루센카 같은, 그의 소설 속 강한 여자의 원형을 수슬로바에게서 찾는다. 결론적으로 수슬로바는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에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다. 도스토옙스키 연구가 모츨스키에 따르면 수슬로바는 1839년 농노의 딸로 태어났다. 농노해방령이 내려진 1861년, 그녀는 22세였다. 수슬로바는 당시 사회적 변화에 관심이 많았던 전형적인 60년대(1860년대) 신여성이었다(*당시 러시아에서는 그러한 신여성을 '60년대 여성'이라고 불렀다). 수슬로바는 많은 책을 읽었고 여성해방을 옹호했다. 단편소설도 여러 편 썼다. 그래서 그녀는 단편 작가로 불린다. 고바야시 히데오의 『도스토옙스키의 생활』을 보면, 수슬로바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딸 류보피의 이런 기록도 있다.

에메(류보피)에 따르면, 폴리나는 지방의 부자 친척한테 학비를 받아 쓰며, 페테르부르크에서 제멋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나 수업을 듣지도 않았고 시험을 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는 늘 와서 학생들과 시시덕거리거나, 다른 학생들 집에 찾아가서 일을 방해하거나, 학생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거나, 항의문에 서명을 하게 하거나 했다. 정치적인 시위운동 등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행렬의 선두에 서서 붉은 깃발을 세우고 마르세이유의 노래(La Marseillaise, 프랑스 국가)를 크게 불렀고, 코사크 병사에게 욕을 하다가 싸우거나, 헌병을 조롱하다가 얻어맞거나, 유치장에서 밤을 지냈을 때에는 '혐오스러운 차리즘(제정 러시아)'의 빛나는 희생자로서 학생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기도 하였다. 무도회와 문학 집회라면 어느 곳이든 얼굴을 비치고, 학생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박수를 치곤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고바야시 히데오, 이은선 번역)

도스토옙스키와 수슬로바는 1863년 유럽 여행 후 모두 떨떠름한 기분으로 헤어졌으나 서로에 대해 약간의 미련은 갖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와 재혼한 후에도 수슬로바는 도스토옙스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안나는 이 편지를 보고 비로소 자기가 속기를 했던 『도박꾼』 속의 여주인공 폴리나와 같은 이름의 여인이 실재함을 알게 되었다. 1863년 10월 말 수슬로바와의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요양차 블라디미르에 가 있던 마리야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이듬해인 1864년 4월 마리야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킨다. 마음속에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1 생각에 잠겨 있는 도스토옙스키(그림). 2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3 도스토옙스키의 애인 중 하나였던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 

 

첫 부인과 사별 후 만난 두 명의 여인

마리야가 죽은 후 1864년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매우 힘든 한 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두 명의 여성을 상대로 재혼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두 여성의 이름은 안나 바실리예브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이름이 엄청 길다)와 마르타 브라운이다. 그중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두 번째 부인이 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에도 자세히 기록될 만큼 도스토옙스키 부부와 우정 관계를 오래 유지한 특이한 케이스다.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가 발행하던 잡지 <세기>에 원고를 보냈던 문학소녀였다. 단편소설이었다고 하는데 이 원고가 채택되고 원고료가 그녀의 집으로 배달되면서 부모가 이를 딸의 탈선으로 오해해 한동안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얼마 후 이해가 되었지만…. 아무튼 그러한 인연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를 알게 되었고 청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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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로 유형 가기 전 8개월간 수감됐던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네바강 쪽 문.

1849년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로 유형 가기 전 8개월간 수감됐던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네바강 쪽 문.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혼동을 피하기 위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를 이 챕터에서는 '안나 부인'으로 부른다)는 그녀의 회상기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수슬로바의 이름은 한 번도 거명하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폴리나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나 부인은 폴리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회상기 속에 몇 차례 언급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 대해 안나 부인이 속기사로 자기 집에 드나들 때부터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안나 부인은 회상기에서 "언젠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는 안나 바실리예브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게 청혼했던 이야기를 상세히 해주었다. 이 똑똑하고 착한, 재주 많은 아가씨의 승낙을 얻고 얼마나 기뻤던지, 하지만 상반된 신념 때문에 그들이 함께하는 행복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후 그녀와의 약혼을 파기했을 때는 얼마나 우울했던지를, 그는 내게 다 말해주었다"라고 썼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녀와 실제로 약혼을 했다거나 신념의 차이로 약혼을 파기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러시아의 저명한 수학자가 된 그녀의 여동생 소피야 코발레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가 언니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 것은 당시 14세였던 자신이었다고 밝혔다.


도스토옙스키 부부와 오랫동안 우정 유지

도스토옙스키가 생전에 사용하던 우산(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도스토옙스키가 생전에 사용하던 우산(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도스토옙스키가 생전에 사용하던 우산(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안나 부인은 도스토옙스키와 결혼 한 지 6년 후에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를 대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후 친하게 지냈다. 안나 부인은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가 탁월한 지성과 착한 심성, 높은 도덕성의 소유자라고 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정당했다"고 회상기에 적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안나 부인에게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살면서 내가 만난 훌륭한 여성들 중 하나지. 그녀는 굉장히 똑똑하고 훌륭한 심성을 지녔고, 높은 도덕성을 갖춘 아가씨였지. 하지만 그녀의 신념은 나와는 정반대였고, 그녀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었소. 게다가 지나치게 직선적이었거든. 이 때문에 우리의 결혼은 도저히 행복할 수가 없었던 거요. 나는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거두었고 그녀가 사상이 같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소!"

안나 부인은 두 사람이 결혼했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었으리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믿음 또한 정당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안나 부인은 회상기에서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게는 양보라는 것이 없었다. 한데 좋은 부부관계에서, 특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처럼 지병으로 인해 병약하고 쉽게 흥분하는 사람과의 결혼 생활에서는 더욱 필요한 것이 양보다. 게다가 당시 그녀는 정치 투쟁에 너무 몰입해 있어서 가족에게 많은 관심을 나눠 주기가 어려웠다. 해가 지나면서 그녀도 변해갔다. 그래서 나는 훌륭한 아내이자 상냥한 어머니였던 그녀를 기억한다"고 썼다. 그러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의 운명은 비참하게 마감되었다고 안나 부인은 말했다.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도스토옙스키와 헤어진 후 바로 해외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정치적 신념을 지닌 프랑스인 자클라르를 만났다, 자클라르는 파리 코뮌(*1871년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여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 시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됐다가 장인의 도움으로 도주하여 가족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았으나 상속 받은 많은 돈을 어딘가에 투자했다가 날리면서 파산 상태가 되었다.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는 이에 충격을 받아 앓아눕게 되었고 귀국 허가를 받은 자클라르가 그녀를 파리로 데려갔으나 파리에서 1887년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애인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에 대한 이야기다.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 역시 도스토옙스키 소설 『백치』에 등장하는 예판친 장군의 딸 아글라야의 원형으로 분석된다. 소설 속에서 아글라야는 나스타시야 못지않은 미모에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급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환상적 방랑자 마르타 브라운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인근의 노점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인근의 노점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인근의 노점상.

세 번째로 등장하는 마르타 브라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E. H. 카가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에서 비교적 많이 다루고 있다. 마르타 브라운과의 엇갈린 애정도 안나 고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교제하던 비슷한 시기인 1864년 말부터 1865년 봄까지의 일로 알려져 있다.

첫 부인 마리야가 죽고 나서 대략 반년이 조금 더 지났을 때다. 마르타 브라운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환상적 방랑자였던 것 같다. 그녀는 "인생이란 추억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항상 믿어왔다"고 뒷날 술회했다고 E. H. 카는 기록해놓았다.

그녀는 무일푼에 단신으로 말도 잘 안 통하는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등을 그때그때 보호자를 바꿔가며 방랑했다. 어떨 때는 헝가리인, 어떨 때는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동반자였다. 때로는 도보로 때로는 말을 타고 여행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서 한 프랑스 남자의 도움으로 벨기에로 갔다. 후일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보 중의 바보'라고 표현한 사람이다. 그러나 마르타 브라운은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네덜란드로 갔다. 여기서도 머무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혼자 영국으로 건너간다. 역시 무일푼 상태였고 당시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영국에서는 템스 강변의 아름다운 거리인 임뱅크먼트에서 잠을 잤고, 자살을 기도하다가 이틀간 감옥에 들어간 일도 있다.

그녀는 화폐 위조범들과 만나 잘못된 길로 갔다가 한 인정 많은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소개로 미국 볼티모어 출신 뱃사람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브라운'이란 이름은 그 남자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한다. 마르타 브라운은 영국에서 4년간 살았다. 그러다 어떤 사건 때문에 터키로 도망치던 중 비엔나에서 검거됐다가 1862년 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에는 고르스키라는 술주정꾼 언론인의 정부가 되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다음 호에 계속)

'『시베리아 문학기행』의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이 8월 24일부터 31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원에서 실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 2018. 05 311쪽 참조.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러시아 문학 기행 강좌

- 강사 이정식
- 일시 및 장소 5월 29일(화) 오후 4시, 용산 서울문화사 별관 강당
- 문의 02-799-9127(<우먼센스> 편집팀)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05월호

2018년 05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