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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⑥

체호프의 『사할린섬』과 사할린의 한인들

On November 14, 2017 0

지난 호에서는 러시아의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1860~1904)가 사할린에서 최고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할린이 체호프를 그처럼 앞세우는 이유는 그가 1890년 시베리아를 방문한 후 펴낸 책 『사할린섬』이 유형지 사할린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 때문이다. 체호프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두 달 20일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해 사할린섬에 도착했다.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더구나 그는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던 폐결핵에 걸린 상태였다. 그는 사할린에 석 달간 머물며 많은 유형수와 주민들을 만나고 실태조사 카드를 만들었다. 카드가 1만 장이라고도 하고 8천 장이라고도 한다.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다. 그러고는 배를 타고 동남아와 인도양을 돌아 수에즈 운하, 흑해를 거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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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남부 코르사코프 항구 위 망향의 언덕에 서 있는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한인 희생자 위령비’.

사할린 남부 코르사코프 항구 위 망향의 언덕에 서 있는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한인 희생자 위령비’.

 

한 여배우로부터 들은 흥미로운 사할린 이야기

그러면 체호프는 어디에서 어떤 자극을 받아 사할린행을 결심하게 됐을까? 체호프가 사할린행을 결심한 가장 큰 동기는 여배우 클레오파트라 카라트이기나와의 만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체호프는 사할린으로 출발하기 열 달 전쯤인 1889년 6월, 바로 위의 형 니콜라이의 죽음을 겪은 후 동생 이반을 데리고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얄타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당시 흑해의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는 모스크바 말르이 극장이 순회공연 중이었다. 체호프는 그 소식을 듣고 오데사로 가서 말르이 극장의 공연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여배우 클레오파트라 카라트이기나를 만난다.

클레오파트라 카라트이기나는 한 해 전인 1888년 이르쿠츠크와 극동 지역을 돌며 공연했고, 사할린 남단의 코르사코프까지 갔었다. 카라트이기나의 시베리아와 사할린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체호프에게 커다란 자극으로 다가왔다. 체호프는 사할린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에 들어간다.

체호프는 사할린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사할린에 관한 많은 자료와 서적을 찾아 읽었다. 그 가운데 주의 깊게 읽은 책이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1812~1891)가 쓴 『전함 팔라다』였다. 19세기 러시아의 저명한 작가 중 한 사람인 곤차로프는 40세 때인 1852년 10월 제독 푸차진의 비서로 전함 팔라다호를 타고 세계 일주 항해를 떠난다. 팔라다호의 항해 목적은 극동의 국가들과 통상 교섭을 하는 것이었다. 팔라다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 발트해를 지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협을 거쳐 적도를 넘어갔다. 그리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가 극동으로 향했다. 아직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지 않았을 때였다.

팔라다호에는 400명 이상의 해군이 승선해 있었으며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필리핀, 조선 등을 오가며 교섭을 벌였다. 그러고는 동해를 지나 북으로 올라가 러시아 본토와 사할린 사이의 타타르 해협을 지나 오호츠크해의 해안까지 갔다. 곤차로프는 이곳에서 배에서 내려 시베리아를 횡단해 1855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했다. 그 후 1858년 여행기 『전함 팔라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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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사할린 여행 이동 경로.

체호프의 사할린 여행 이동 경로.

 

이상한 모자 쓴 조선인

1 갓 쓴 양반이 그려진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18세기 또는 19세기 초로 추정되는 작품 ‘월하정인(月下情人)’.  2 안톤 체호프(1860~1904). 3 이반 곤차로프(1812~1891).

1 갓 쓴 양반이 그려진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18세기 또는 19세기 초로 추정되는 작품 ‘월하정인(月下情人)’. 2 안톤 체호프(1860~1904). 3 이반 곤차로프(1812~1891).

1 갓 쓴 양반이 그려진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18세기 또는 19세기 초로 추정되는 작품 ‘월하정인(月下情人)’. 2 안톤 체호프(1860~1904). 3 이반 곤차로프(1812~1891).

『전함 팔라다』에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팔라다호는 1854년 4~5월 우리나라 남해의 거문도와 동해안 여러 곳에 들렀다. 이때 곤차로프도 해군들과 함께 육지에 올라가 조선 사람들을 만났다. 1854년이면 조선 말기 철종 때다.

곤차로프는 조선인들의 모습과 관습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본 조선인의 모습이 그 속에 있다. 백의민족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이 마치 수의(시체에 입히는 옷) 같다는 등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자그마한 만의 생기 없는 바닷물 위 여기저기에 조선인의 농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이는 것은 초가지붕뿐이고, 드물게 군데군데 주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맨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
조선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독립국이라 부를 수 있다. 조선은 자신의 군주가 통치하고, 국가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군주들은 왕위에 오를 때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는다. 이 승인 하나로도 조선의 중국에 대한 종속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종속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중국 황제에게 새해 축하를 하기 위해 매년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다녀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집에 살고 있는 독립한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의존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전함 팔라다』, 398쪽, 문준일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14)

조선의 양반들이 쓰고 다니던 갓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밀한 묘사도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모자 종류였다. 그들은 머리를 유구인들처럼 사방에서 우리로 빗어 올려 하나로 묶었고(상투 튼 것을 말함), 그 위에 모자를 썼다. 이런 모자라니! 모자의 꼭대기는 너무 좁아서 하나로 묶은 머리채를 겨우 가릴 뿐인데 반해 챙은 마치 우산처럼 넓었다. 이 모자들은 갈대 같은 것으로 만들었고(실제로는 말총 즉 말 꼬리털이다), 마치 머리카락처럼 촘촘히 엮어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 머리카락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더욱이 모자는 검은색이다. 그들이 왜 이런 모자를 쓰는지 추측하기 힘들었다. 그 모자들은 투명하고 내비쳐서 머리를 비와 햇빛, 먼지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한다. 게다가 여러 다른 형태와 종류의 모자들이 많이 있다. 피나무 껍질로 만든 것도 있고, 바다 식물로 만든 고깔모자도 있다.”
(『전함 팔라다』, 400쪽)

현대를 사는 많은 한국인들도 우리 조상이 쓰고 다니던, 비나 햇빛을 막아주지도 못하는 모자인 갓의 실용성에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문을 진작에 곤차로프가 그의 저서를 통해 제기했던 것이다.

체호프는 미국의 여행가이며 극동 연구가인 조지 캐넌(1845~1924)의 저서인 『시베리아와 유형제도』도 열심히 읽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지 캐넌은 한때 러시아의 유형제도를 비교적 좋게 평가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직접 시베리아 유형소를 둘러본 후에는 시각이 바뀌었다. 1885년에 출간한 『시베리아와 유형제도』에 그가 목격한 시베리아 유형소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체호프가 사할린섬으로 출발하기 5년 전이다.
 

사할린 한인들의 한 맺힌 과거

사할린의 한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담긴 책이 체호프가 사할린에 다녀와서 쓴 책 『사할린섬』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체호프가 사할린에 갔을 때인 1890년 7월, 사할린 남부 서쪽 해안 마을 마우카(현재 이름은 홀름스크)에서 세묘노프라는 러시아 상인이 다시마 채취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들이 거기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책 뒤쪽의 주석에 1880년의 자료에 마우카 주민의 구성이 유대인 3명, 러시아 군인 7명, 그리고 한국인, 아이누인, 중국인 등 700명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이 몇 명인지 구체적인 숫자는 나와 있지 않다.

사할린 전체 인구는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겨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를 점령한 후부터 급격히 늘기 시작했으며, 한인의 숫자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무렵부터 크게 증가한다.

1907년 약 2만 명(남사할린)이었던 인구는 1941년 40만6천500명으로 20배가량 늘어난다. 이 가운데 한인(조선인)의 수는 8천 명이었다(주: 이 글에서는 ‘한인’과 ‘조선인’을 출처와 상황에 따라 혼용함을 밝힌다). 1920년에 실시된 인구조사 때 남사할린에는 934명의 한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사할린 한인사』, 69쪽, 아나톨리 쿠진, 한국외대 지식출판원, 2014).

한인은 1941년을 전후하여 처음에는 자유(일반) 모집에 의해 사할린으로 왔다고 한다. 사할린의 임금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거짓 선전도 한몫했다. 그러나 차츰 반 강제적인 관(官) 알선 형태로 바뀌었다. 태평양전쟁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군수산업을 가동하기 위한 석탄 생산의 필요성 등이 커졌기 때문이다. 자연히 광부의 충원이 필요했다. 일제는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군 단위로 인원을 할당했다. 각종 압박에 못 이겨 가장이나 아들 중 한 사람이 반 강제로 사할린에 끌려갔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징용령’을 근거로 길에 가던 젊은이들까지 마구잡이로 트럭에 태워 끌고 가는 강제징용으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 같은 강제 유입의 결과, 1945년 8월 일본 패망 무렵 한인의 수는 4만3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남사할린 전체 일본인 주민 총수 41만3천 명의 10.4%에 달하는 숫자였다. 해방 전 이중 징용(일본은 이를 ‘전환배치’라고 한다)으로 사할린에서 다시 일본 본토로 끌려간 약 3천 명은 여기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할린에서 다시 가족들과 헤어져 군함도(하시마) 등으로 간 한인 광부들은 일본 패전 후 뱃길이 끊겨 사할린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족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더러는 한국에서, 더러는 일본에서 세상을 떴다. 현재 사할린의 한인은 2만5천 명이다. 사할린 전체 인구 50만 명의 5%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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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한인문화회관. 2 사할린 한인 이중 징용 피해 광부 추모비. 한인문화회관 앞에 있다. 3 포자르스코예의 한국인 피살자 27인 추념비.

1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한인문화회관. 2 사할린 한인 이중 징용 피해 광부 추모비. 한인문화회관 앞에 있다. 3 포자르스코예의 한국인 피살자 27인 추념비.

 

일본인의 악행 - 사할린 한인 학살 사건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항복 명령이 전선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탓에 사할린에서는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군과 소련군 간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조국에서는 온 민족이 해방의 기쁨으로 들떠 있을 때 사할린에서는 일본인들의 시퍼런 살의가 한인들 주위에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1932년 관동대지진 때와 같은 조선인 학살 사건이 사할린에서도 벌어지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지만, 알려진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미즈호(포자르스코예)와 가미시스카(레오니도보) 학살 사건이다.

1. 미즈호 학살 사건 :
일본의 항복 선언 닷새 후인 1945년 8월 20~22일(3일간) 사할린 서부 해안 도시 홀름스크에서 내륙으로 40km가량 들어간 미즈호(현재의 이름은 포자르스코예) 마을에서 벌어진 일인들에 의한 한인 집단 살해 사건이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틀 후인 8월 8일, 그동안 일본과의 전쟁에 소극적이던 소련이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음을 알고 뒤늦게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극동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남사할린에서는 소련군이 북쪽에서 진격해 오자 일인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일인들은 마을별로 제대 군인들과 마을 청년들로 의용전투대를 결성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즈호 마을 일인 의용전투대가 이 마을 한인 27명을 일본 군도와 죽창 등으로 무참하게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3명의 여성과 어린이 6명이 포함된 숫자다. 냉동 창고에 갇혔다가 바다에 던져진 사람도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일인들과 한인들이 함께 살아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일본 헌병의 사주와 비호 아래 저질러진 학살이었다. 당시 일인들 사이에는 ‘조선인들 속에 소련의 스파이가 많다’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협력하여 일본인들에게 해를 입힐 것이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깊숙이 퍼져 있었다. 소련군에는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부랴트족 등 몽골 계통의 군인도 있었고 러시아에 귀화한 고려인도 섞여 있었다. 일인들은 사할린의 조선인들이 소련군 내의 그들과 내통한다고 의심했다.

미즈호에서의 그 같은 참혹한 학살 사건은 자칫 역사 속에 그대로 묻힐 뻔했다. 그런데 1946년 초, 이상한 소문이 소련 정보기관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사할린으로 진격할 당시 미즈호 지역 어딘가에서 일본 경찰들이 한인 몇 가족을 학살했다는 소문이었다.

방첩기관 스메르시의 고라쇼브 소령은 코레니프스키 소위에게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 일인들을 전범으로 처벌할 증거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코레니프스키 소위는 마침내 한국 출신 61세 농민 윤양원 씨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듣는 성과를 올린다.

“2월 말에 저는 지금 일하고 있는 어류 공장에서 미즈호 마을로 소를 사러 갔습니다. 그곳에는 한국 이름 채정환이라고 하는 친한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집에 없었고 대신 일본인 아내 사토 미사코시가 자기 남편은 이미 작년 8월에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여자 혼자 사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지라 사람들은 그녀를 마오카의 다른 한인과 결혼시켰지요. 저는 때를 엿보다가 그녀에게 ‘당신이 재혼했는데 남편이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이 살해당했다고 고백했습니다. 8월에 러시아인들이 마오카에 상륙했을 때 일본 헌병의 명령에 따라 미즈호 마을의 모든 한인들이 살해당했다고 했습니다.” ( 『사할린 미즈호 마을의 비극』, 꼰스딴찐 가뽀넨코 지음, 장한나 번역, 새문사, 2015)

스메르시는 마침내 1946년 6월, 학살에 가담한 일인 18명을 전원 체포해 전범 재판에 회부했다. 이 가운데 7명은 194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살형에 처해졌고, 10명은 약 10년간 시베리아 유형 후 일본으로 송환된 것으로 전해진다.

포자르스코예의 도로에서 조금 들어간 나지막한 언덕에 1996년 대한민국 사단법인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가 세운 ‘한국인 피살자 27인 추념비’ 뒤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1945년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 포자르스코예에서 일본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한 분풀이로 곧 진주할 소련군에 협력하여 일본인들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인 27인을 학살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기억하며 희생당한 동포 영령들을 위령하기 위해 비를 세운다. 우리 모두 과거를 영원히 기억하고 전쟁의 허망을 깨닫고 인류 평화를 애호하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자./서기 1996년 8월 3일”
 

일제 말기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사할린 이동 경로.

일제 말기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사할린 이동 경로.

일제 말기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사할린 이동 경로.

2. 가미시스카 경찰서 학살 사건 : 1945년 8월 18일, 북위 50도 소련과 사할린 국경 바로 아래 포로나이스크 지역 가미시스카(현재 이름은 레오니도보) 경찰서에서 발생한 한인 학살 사건이다.

일본 경찰과 헌병은 소련군과 내통한다는 유언비어에 따라 한인 18명을 무차별 체포해 경찰서 유치장에 가둬놓고 살해한 후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웠다. 레오니도보 마을에는 희생자의 딸이 피맺힌 심정으로 세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추모비가 있다.

“1945년 8월 17일 일본 헌병은 나의 아버지 김경백(53세)과 오빠 김봉재(18세)를 체포하여 다음 날 다른 조선인 수십 명과 함께 경찰서에서 살해하고 불태웠다.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1945년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악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1992년 8월, 김경숙, 대한민국”

1932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원인 관동 지역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14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 4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일인들 사이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혼란을 틈타 곳곳에 불을 지르고 있다’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급속하게 퍼졌다. 일본 전역에 자경단이 만들어졌고, 조선인 사냥이 벌어져 6천6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영문도 모른 채 일본도와 곤봉, 죽창에 살해되었다. 이와 판박이인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왕의 항복 선언 직후 사할린 곳곳에서 일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패전 후 사할린 철수 대상에서 조선인을 배제시켰다. 조선인의 대규모 일본 입국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종전 후에도 일본 국적이었으나 일본은 조선인의 일본 국적 상실을 주장하고 나왔다. 동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쪽 코르사코프 항까지 갔지만 일본은 조선인을 배에 태우지 않았다. 일본인의 본토 귀환에 따른 사할린의 노동력 부족을 우려해 소련이 일본의 그 같은 처사를 방관했다는 설도 있다.

고국에서는 해방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 분단 상태가 되어 사할린의 동포를 챙기지 못했다. 소련은 참전 당시 미국과 일본 홋카이도의 분할 통치를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미-소의 책상 위에서 한반도의 분할로 바뀌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 위령탑

사할린 동포의 70%가량은 경상도나 전라도 등이 고향인 남한 쪽 사람들이었다. 동포들은 귀향할 날을 기다리며 무국적 상태로 오랜 세월 고난의 삶을 이어갔다. 한국과 소련이 국교를 수립할 때(1990년)까지 해방 후 무려 4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코르사코프의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 아래에는 서울대 김문환 교수가 지은 다음과 같은 글이 검은 돌 위에 새겨져 있다.

1945년 8월, 애타게 그리던 광복을 맞아
동토의 사할린에서 강제 노역하던 4만여 동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분들을 내버린 채 떠나가버렸습니다.
소련 당국도
혼란 상태에 있던 조국도
이들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중략)---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돌아갈 길이 없어
아직도 서성이는 희생 동포들의 넋을
조국으로, 세계로, 자유롭게
모시라는 뜻을 모아
이 ‘망향의 언덕’에
단절을 끝낼 파이프 배를 하늘 높이 세웁니다.

(주: 위의 글에서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는 ‘일본 호적이 아니라는 이유로’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당시 일본은 일본 호적에 등재된 사람만을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조선인을 제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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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즈노사할린스크 공동묘지에서 성묘하는 사할린 동포들. 사할린 동포들은 광복절인 양력 8월 15일을 추석으로 쇠고 있다. 음력 8월 15일을 챙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즈노사할린스크 공동묘지에서 성묘하는 사할린 동포들. 사할린 동포들은 광복절인 양력 8월 15일을 추석으로 쇠고 있다. 음력 8월 15일을 챙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군함도>와 <박열>

2017년, 올해 개봉된 영화 <군함도>와 <박열>은 일제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비참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지만 식민지 백성으로서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의 일단을 영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제작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역사를 모르고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는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악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고 사할린의 추모비에 새긴 학살 희생자의 딸 김경숙 씨의 한(恨)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한다.
 

▶ <우먼센스>에서는 바이칼BK투어(주)와 함께 2018년 2월 16일부터 23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얼음 왕국 바이칼 탐방 여행'을 진행한다.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관련 내용은 우먼센스 2017년 11월호 94쪽 참조.
[투어] 러시아 문학 기행 7박 8일

지난 호에서는 러시아의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1860~1904)가 사할린에서 최고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할린이 체호프를 그처럼 앞세우는 이유는 그가 1890년 시베리아를 방문한 후 펴낸 책 『사할린섬』이 유형지 사할린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 때문이다. 체호프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두 달 20일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해 사할린섬에 도착했다.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더구나 그는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던 폐결핵에 걸린 상태였다. 그는 사할린에 석 달간 머물며 많은 유형수와 주민들을 만나고 실태조사 카드를 만들었다. 카드가 1만 장이라고도 하고 8천 장이라고도 한다.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다. 그러고는 배를 타고 동남아와 인도양을 돌아 수에즈 운하, 흑해를 거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7년 11월호

이달의 목차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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