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평론가 중에는 이영화가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를 받았다고 투덜거리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영화적·미학적 성취를 떠나서 관객과 뜨겁게 소통하는 영화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지간히 냉정한 관객 축에 드는 나 역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불안한 사회를 견디고 있는 우리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몇달째 광장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의 초상이나 다름없다.
켄 로치의 영화 속 주인공이 대개 그렇듯 다니엘 블레이크도 가난하고 소외받는 노동자다. 그는 심장질환 때문에 목수 일을 그만두고 의료수당을 받으려 하는데 자기네 편의와 효율성만 중시하는 관료들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는 다니엘보다 처지가 더 딱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굶주려 왔고, 생리대를 살 돈조차 없어 편의점에서 도둑질을 한다. 그러고 보면 양극화와 소통 부재에 시달리는 건 우리만이 아닌 듯 싶다. 지금은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탐욕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러나 다니엘이 원하는 건 엄청난 게 아니다. 그는 국가로부터 정당한 복지를 받길 원하며, 한 인간이자 평범한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보장받으려 한다. 이처럼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노인의 고집스런 인간 선언이자 가장 기본적인 투쟁을 담고 있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좋은 사회란 대단한 결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그리는 영국도,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도 그리 좋은 사회는 아닌 것 같다.
죽도록 노력해야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그런데도 가난은 너의 무지와 게으름 탓이라고 비난하는 사회. 영화는 이런 비정한 현실을 따라가면서 마지막까지도 기적을 안겨주지 않는다. 그나마 이 냉혹한 진실 앞에서 따뜻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회적 약자들이 연대할 때다.
자신의 삶을 추스르기도 버거운 다니엘과 케이티는 서로를 위로하고 돕는다. 네 잘못이 아니라며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국가가 개인의 존엄성을 외면할 때 오히려 개인들은 타인을 위한 마음 한편을 남겨놓을 줄 안다. 이런 공감과 연대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한국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라고 한다. 국가에 의지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살아나갈 방법을 찾는다는 의미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그런지 이 말이 더욱 외롭고 절망스럽게 들린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아이의 각자도생을 위해 어디까지 뒷바라지해야 할까?
조물주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건물주의 삶을 물려주면 다 해결될까? 아니, 열심히 노력하면 꿈이 이루어지기는 할까? 시절이 하도 수상하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그래도 수많은 다니엘 블레이크들이 연대해 왔고 또 연대하고 있기에 세상은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대단하게 성공하길 원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부모들은 그저 인간으로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길 바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독한 시간을 함께, 현명하게 보내야 한다. 내가 행복하려면 너도 행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민경 씨는요…
여섯 살, 네 살배기 두 아들을 키우는 만년 초보 엄마이자 생계형 프리랜서 라이터. <스크린>, <무비위크> 등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지금도 틈틈이 보고 읽고 쓴다. 엄마가 행복해져야 아이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