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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월드의 이상한 여자들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시작부터 화제였다. 과감하고 아름다운 소설들을 써내는 정세랑 작가와 괴상하고 기이한 에너지로 질주하는 이경미 감독의 만남이라니! 뚜껑을 열자, 정세랑의 상냥한 세계는 이경미의 이상한 세계로 덧입혀져 있었다. 안은영, 아라, 완수, 혜민, 래디라는, 이상한 매력으로 들끓는 여자들. 여기엔 계보가 있다. 영화평론가 듀나가 이경미 월드의 이상한 여자들을 낱낱이 파헤쳤다.

UpdatedOn October 26, 2020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이 넷플릭스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감독이 이경미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두 세계가 어떻게 만날지 궁금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세랑 월드와 이경미 월드는 거의 모든 면에서 방향이 반대다. 정세랑의 세계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캐릭터는 일상성을 추구한다. 이경미는 얼핏 보면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캐릭터들은 늘 꿈틀거리면서 이 위장된 안정성을 뚫고 나온다. 드라마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답은 후자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의 재료를 거의 완벽하게 이경미 스타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 때문에 원작의 팬들 중 상당수는 드라마의 묘사에 불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원작에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낙천주의와 선량함이 드라마에는 많이 부족하다. 드라마는 정세랑의 소설이 제공한 위안과 위로를 주지 않는다. 세계는 원작 소설보다 훨씬 위험해졌고 그에 맞서는 사람들도 원작의 선량함을 품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난폭해진다.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난폭함은 이경미 월드, 특히 그 세계를 사는 여자들을 묘사할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단어다. 이경미의 여자들은 난폭하다. 이들의 천성이기도 하지만 원래부터 세상이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숨을 쉬고 살아남으려면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흐름에 폭력적으로 맞서야 한다.

원작이 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 경향을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작품이다. 캐릭터 대부분이 ‘이경미’화되었기 때문에 ‘이경미’화 이전의 캐릭터와 겹쳐놓고 입체시의 관찰이 가능해진다.

주인공인 안은영을 보자. 장난감 총과 칼로 초자연적인 존재에 맞서 싸우는 보건교사라는 설정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드라마 안은영은 원작 안은영과는 달리 늘 불안하게 정상성과 공감성의 영역 바깥으로 넘어간다. 사교성은 훨씬 떨어지고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감이 부족하다. 원작보다 훨씬 남의 기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에 가깝다. 첫 에피소드에서 기가 빨리는 인표가 얼마나 뱀파이어의 희생자처럼 보이는지 보라. 설정은 같지만, 원작이 좋게 묘사한 것들을 드라마는 직설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나에겐 이게 더 현실에 가까워 보인다. 정세랑의 세계는 현실보다는 소망을 반영하는 편이고, 세상과 사람들은 언제나 더 추하고 힘들기 때문에.

안은영 주변의 학생들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다. 이들은 각색을 거치면서 모두 ‘여자아이의 전형성’으로 보이는 성격을 조금씩 잃었다. 학교 남자애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아라는 단 한 번도 예쁘고 착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래디 역시 전형적인 한국 K-팝 아이돌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반대로 원작에서 남자아이였던 지형은 완수라는 여자아이로 바뀌었는데, 그 때문에 완수는 원작의 지형과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도 전혀 결이 다른 인물로 완성된다. 이들은 모두 청소년물 서사가 가진 여자아이의 전형성에 대한 기대에 맞서며 부글거린다. 이들은 색조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민낯에 가까운 얼굴로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드러낸다. 이들의 욕망은 옳건 나쁘건 은폐되지 않는다.

이 풍경은 익숙하다. 이들이 현실 세계의 아이들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고(물론 대부분은 이들처럼 재미있거나 다채롭지 못하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예술이 할 일이 아니다), 이경미는 이미 두 편의 영화에서 한국의 학교 환경과 이에 충돌하는 아이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들에 비하면 <보건교사 안은영>의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무난해 보인다. 원작이 그어놓은 선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래디와 혜민은 후반에 무심히 그 선을 넘는다. 동성애 혐오 에피소드는 커플에게 이름과 얼굴을 주면서 원작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설정상 고정된 성 정체성이 없는 것으로 나오는 ‘옴잡이’ 혜민을 표현할 때 인위적 중성성을 배제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존재가 당연한 이는 자신의 위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에 등장하는 여자 중학생들은 21세기 한국 영화가 만든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이들의 무서움은 이제는 지루해진 ‘중2병’이라는 표현을 가뿐하게 넘어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여중생’의 틀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반항적인 청소년’의 고정된 틀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문화적 클리셰와 무관하게 그들 자체로 존재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선악의 구별도 없다. <미쓰 홍당무>에서 서우가 연기한 서종희가 하는 짓을 보라. 아버지를 짝사랑하는 교사와 작당해 아버지로 위장한 다음, 아버지와 수상쩍은 관계로 발전할 것처럼 보이는 다른 교사와 온라인 섹스를 한다. 영화를 안 본 관객이라면 위의 문장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다시 한번 읽어봤을 것이다. 이 캐릭터의 야수성은 결코 문화적 틀로 가둘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비밀은 없다>의 미옥과 민진은 더 가차없다. 이 필름 누아르의 진상을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는 건 로스 맥도널드 뺨치는 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옥과 민진의 난폭한 행동이 늘 기대와 예측의 선을 넘기 때문이다.

기대와 예측의 선을 넘는 건 이경미의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과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아이들만큼이나 난폭한 존재다. 학교 왕따인 미숙과는 달리 유명 정치인의 아내인 연홍은 겉보기엔 사회성이 풍부해 보이지만 위장에 불과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적응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모두 미숙한 어른이고 아마 ‘미숙’이라는 이름은 말장난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이경미가 만든 무시무시한 중학생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다. 정상성에 대한 기대가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장르적으로 보았을 때, <미쓰 홍당무>는 범죄자들이, <비밀은 없다>는 탐정이 주인공인 추리물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대부분 영리한 쪽과 더 영리한 쪽의 지능 대결이다. 하지만 이경미의 세계에서 이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범죄자와 탐정으로서 미숙과 연홍의 최대 장점은 어처구니없고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상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어리석음은 이경미의 여자들을 설명할 때 난폭함만큼 요긴하게 쓰이는 단어다. 그리고 이는 생각만큼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어리석음의 반대어는 아마도 현명함일 것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현명함이란 어떤 의미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과연 그게 긍정적인 단어인가? 이것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세계는 얼마나 비정상적인가.

이경미의 세계에서 여자는 늘 균열을 낸다. 그리고 이 안에서 남자는 언제나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의 존재가 당연한 세계에 익숙해져 있기에, 맞서는 힘을 예측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들이 가해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농구부 남자아이의 폭력은 가혹하기 짝이 없지만 그 평범함과 진부함 때문에 이들은 오로지 도구적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이경미의 여자들이 저지르는 모든 폭력은 아무리 사소한 몸짓이라도 자기만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 균열은 묻히지 않을 것이다. 이 어리석은 여자들은 자신을 돌보기 위해 자기가 가한 피해를 축소시킬 생각 따위는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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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예지
WORDS 듀나(영화평론가)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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