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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의 자존심

너도나도 ‘스웨그’를 외치는 이 시대에, 굽힘 없이 꼿꼿하게 록 스피릿을 전파하는 형님들이 있다. 대한민국 록의 자존심을 만났다.

UpdatedOn June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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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정민준이 입은 번개 패턴의 스카잔은 시스템 옴므, 티셔츠는 누드 본즈 제품.이성우가 입은 블루종은 암위, 신발은 닥터마틴 제품. 정우용이 입은 티셔츠는 느와르라르메스, 라이더 재킷은 올세인트, 선글라스는 해쉬태그 제품. 황현성이 입은 티셔츠는 겐조, 바지는 시스템 옴므, 신발은 슈퍼콤마비, 바지는 누드본즈 제품.

(왼쪽부터) 정민준이 입은 번개 패턴의 스카잔은 시스템 옴므, 티셔츠는 누드 본즈 제품.이성우가 입은 블루종은 암위, 신발은 닥터마틴 제품. 정우용이 입은 티셔츠는 느와르라르메스, 라이더 재킷은 올세인트, 선글라스는 해쉬태그 제품. 황현성이 입은 티셔츠는 겐조, 바지는 시스템 옴므, 신발은 슈퍼콤마비, 바지는 누드본즈 제품.

중년 펑크의 힘 노브레인

1996년 태어난 아기가 만 스무 살의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펑크록 밴드 노브레인은 희로애락의 20년을 보냈다. 1996년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했으며 H.O.T가 등장한 엄청난 시기였다. 홍대에서도 록 신의 지각변동이 예고됐다. 이제는 용이나 해태 같은 전설이 된, 대한민국 최초의 펑크 바, 드럭(Drug)에서 처음 존재감을 드러낸 이들은 맹렬하고도 뜨거운 젊음으로 홍대를 가볍게 접수했다. ‘가죽 잠바’와 징 박은 액세서리, 뾰족하게 세운 헤어스타일을 고수한 채 월드컵 열기를 타고 ‘펑크 하는 국민 밴드’로 발돋움했다. TV에도 많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무한도전>에 출연했고, <불후의 명곡>에도 매주 나오던 시절에 노브레인은 참 즐겁게 음악을 했다. 이제는 동네를 지나다니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소리가 참 좋다’고 칭찬도 해주시는 걸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국구 밴드가 된 거다. 여섯 번째 음반 〈High Tension〉(2011) 이후에도 노브레인은 바쁘게 지냈다. 크라잉넛과 합동 앨범 <96>(2014)을 발표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래미 상을 탄 프로듀서, 엔지니어와 함께 녹음 작업도 했다. 영국에서 공연도 보고 놀기도 하면서 5년을 보냈다. 그 사이 애 아빠가 된 멤버도 생겼다. 2016년 신보 〈Brainless〉는 중년에 접어든 펑크 밴드의 자기 고백과도 같은 앨범이다. 경직된 사회에 노브레인만의 언어로 시원한 일침을 날린다. ‘가죽 잠바’와 타투가 제일 잘 어울리는 이들이 중년이라는 데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데뷔 20주년을 맞은 중견 밴드는 스스로 ‘중년 펑커’라 칭한다.

올해로 데뷔한 지 20주년이 됐다. 신기하지 않나?
황현성
10주년 기념 공연을 올림픽홀에서 했는데, 당시엔 10년이란 숫자가 정말 벅찼다. 훨씬 감동적이었고 우리 스스로도 울컥하는 뭔가를 느꼈다. 그런데 20년이 되니까, 생각보다 큰 감흥이 없다. 그렇게 오래됐나? 싶은 정도다.
정민준 10은 숫자가 딱 떨어지는 맛이 있는데, 20은 어중간해서 그런지 미지근하게 와 닿는다.
이성우 주변에서 축하해주니까 일단 고맙지만, 우리끼리는 덤덤하다. 바이오그래피를 쭉 살펴봤는데 20년 동안 뭘 하긴 한 거 같은데 별거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노브레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해놓은 일이 많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노브레인이 음악 하기 가장 좋은 시절은 언제였나?
정민준
2012년에 내가 서른세 살이었는데, 그때 정말 행복해서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좋은 공연에도 많이 참여했고 미디어에도 자연스럽고 좋은 모습으로 많이 비쳤다. 그때 대중적인 인지도도 많이 올라갔다. 우리 스스로도 활동하면서 탄력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성우 노브레인 초기가 생각나는데 그때는 매일 소풍 가는 기분으로 공연을 했다. 당시 홍대는 아웃사이더가 모여 파티를 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음악 하는 환경은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우리가 전자기타 굉음을 울리고 드럼을 두들기면 사람들이 즐길 준비를 하지만, 당시엔 소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북적북적하고 사람 사는 맛이 있었다.
황현성 힙합 뮤지션이나, 대형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요즘이 음악 하기 좋은 시절일 것이다. 그런데 인디 음악이나 국악을 하는 뮤지션에게는 좋지 못한 때다. 후배 중에도 투잡을 하는 이들이 많은데 음악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음악 시장이란 창작을 해서 팔아야 하는 산업인데, 판매 루트가 많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 또한 낭만이 있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렇다.
정우용 2000년대 초반에 비교적 인디 신이 붐을 탔다. 밴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러고 보면 유행이 돌고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데 밴드 공연을 보러 다니는 사람은 줄어드는 추세다.
이성우
지금은 찾아서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대형 기획사에서 내놓은 음악 외엔 듣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홍대 신만 하더라도 밴드의 음악 장르가 훨씬 다양해졌다. 힙합 신도 그렇고 다들 나름대로 분발하는 분위기다.
황현성 경제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면 지금은 음악 하기 나쁘지 않은 시기다. 음악 할 수 있는 플랫폼도 많아졌다. 예전에는 누가 음반을 냈다는 게 굉장히 큰 이슈 아니었나? 지금은 누구나 집에서 음반을 낼 수 있고, 음원과 저작권 등록을 할 수 있다. 비록 우리는 심의에 다 떨어졌지만, 심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유해졌다.

그런데 정말 심의는 왜 그렇게 걸렸나? 수록곡 절반이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성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참 딱딱하고 힘들지 않나. 그래서 노래를 통해 우리끼리 ‘뒷담화’를 좀 했다.
황현성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욕이 자연스러워졌는데, 유독 음악에선 기준이 야박하다.
정민준 우리의 영혼이 담긴 표현을 단지 ‘저속하다’는 이유로 방송심의 부적격 판정을 내리더라. 시대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 여러 가지 시스템을 ‘뒷담화’한 것이 이번 앨범이다.

요즘 ‘중년 펑크’라는 말을 많이 쓴다. 다들 아직 청년 아닌가?
이성우
물론 마음은 여전히 청년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나이가 되면 중년이라고 하더라고. 〈Brainless〉는 우리 나이대에 맞는 음악으로 채운 앨범이다. 현재 노브레인의 상황과 생각을 솔직하게 담았다.
정민준 젊음 특유의 앞만 보고 돌진하던 때와 다르게, 뒤를 돌아보는 느낌의 앨범이다. 그리고 동안이란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중년’이란 단어가 새롭고 재밌다.
황현성 실제로 노브레인은 젊음과 청춘을 굉장히 많이 노래했다. ‘청춘 98’ ‘청춘은 불꽃이어라’ ‘불타는 젊음’ ‘그것이 젊음’ 등등. 진짜 많다. 이번 앨범은 이상하게도 ‘젊음의 영원함’을 찬양하고 싶지 않았다.
이성우 좋은 뉴스보다 보기 힘든 뉴스가 많은 요즘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억지로 밝은 노래를 하는 것도 어렵다. 신나게 노래할 수도 없고 춤을 출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버럭’ 소리 지르는 것밖에 없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말이다.

펑크 로커는 늘 화가 나 있다. 그런데 20년쯤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지 않던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진 않나?
이성우
‘뭐, 그런가 보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르다’고 생각하면 훨씬 편해진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무슨 일만 생기면 화르르 불타올라 꼬집고 험담하기 바쁘다.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해졌으면 좋겠다.
황현성 나는 결혼해서 아이가 생겼다. 전에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요즘엔 가족만 생각하기도 바쁘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해도 상처 받지 않고 방어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 강해진 것 같다.
정민준 성우 형도 옛날보다 고집을 놓은 부분도 있고, 고집이 너무 센 나머지 아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버린 부분도 있다. 그런 걸 보면서 정답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냥 다를 뿐이다. 어렸을 땐 내가 늘 옳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각자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나. 다들 자기에게 맞는 방식대로 살아간다.
정우용 우리 앨범 7번 트랙 ‘아무렇게’를 들으면 도움이 될 거다.

‘그땐 그랬지’와 더불어 ‘나 때는 안 저랬는데’라는 생각이 ‘꼰대’로 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후배에게 나도 모르게 형님처럼 굴 때는 없나?
황현성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경계한다. 그래서 젊은 친구를 보면 자극을 많이 받는다. 예전에 한창 예민할 때는 나보다 어린 사람을 만나는 게 불편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재미있다. 이런 것 보면 내가 진짜 나이 들었나 보다.
정우용 예전엔 윗사람이 선배나 형이라는 이유로 가르치려 들거나 참견하는 게 참 싫었다.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사실 내 일에 몰두하면 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정민준
훈계하려 드는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몰라서 삐딱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모두 다 사랑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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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훈조가 입은 피케 티셔츠는 프레드 페리, 바지는 유니클로, 신발은 아이콘 풋웨어 제품. 최욱노가 입은 셔츠는 폴 스미스, 바지는 유니클로, 신발은 아이콘 풋웨어 제품. 차승우가 입은 셔츠는 브루투스 런던, 바지는 머크런던, 신발은 아이콘 풋웨어 제품.

(왼쪽부터) 훈조가 입은 피케 티셔츠는 프레드 페리, 바지는 유니클로, 신발은 아이콘 풋웨어 제품. 최욱노가 입은 셔츠는 폴 스미스, 바지는 유니클로, 신발은 아이콘 풋웨어 제품. 차승우가 입은 셔츠는 브루투스 런던, 바지는 머크런던, 신발은 아이콘 풋웨어 제품.

뜨거운 탄생 더 모노톤즈

더 모노톤즈의 탄생 비화를 본격적으로 듣기 전, 유튜브에서 ‘울트라 젠틀맨’이란 트레일러를 꼭 찾아보길 바란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차승우의 ‘보컬 찾아 삼만리’를 4분 33초로 함축한 수작이니까. 1996년부터 노브레인과 문샤이너스를 거쳐 홍대를 한번도 떠난 적 없는 차승우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쯤 삐삐밴드와 원더버드의 베이시스트 박현준에게 새로운 밴드를 결성해볼 것을 청했다. 당시 서교그룹사운드에서 드럼을 치던 최욱노까지 불러 모아 3인조로 라인업을 완성했다. 이후부터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문샤이너스 보컬을 맡은 차승우는 ‘보컬리스트로서 자아를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에 다시는 마이크를 잡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새 밴드에 맞는 새 보컬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홍대 바닥에서 날고 기는 11명 정도의 보컬이 밴드를 거쳐 갔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그는 밴드를 꼭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고심 끝에 ‘뮬’이라는 중고 악기 거래 사이트 구인란에 글을 올렸다. ‘잭 나이프를 잘 휘두르고 데이비드 보위와 이기 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 주시오.’ 이 간단명료한 구인 문구에 걸려든 사람이 있었다. 영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다 온 훈조였다. 그는 중저음을 멋지게 드러내는 법을 아는 보컬이었는데,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서 밴드에 합류하고 싶다고 당당히 말했다. 뭐, 원년 멤버 박현준이 나가면서 객원 멤버로 하선형이 공연하고 있다는 사소한 갈등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지난해 11월 극적으로 정규 앨범 〈In To The Night〉를 발매했다. 밴드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영화로 기록돼 곧 개봉할 예정이니 모두 손수건을 준비하고 극장을 찾길.
 

밴드 탄생기에 대해 익히 들어왔다. 보통 밴드를 꾸리다가도 마음이 맞지 않아서 무산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더 모노톤즈를 완성하고 싶어 했나?
차승우
개인적인 욕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사실은 어떤 위기감이 있었다. 20년 넘게 음악 낭인으로 생활하다 보니 이쯤에서 화끈한 전환점을 만들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우리 밴드도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밴드건 마찬가지겠지만 보컬은 특히 허투루 사람을 들일 수 없다. 그러다 보니까 몇 년간 사람이 들고나게 됐다.

화룡점정을 기다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훈조의 어떤 장점이 더 모노톤즈를 완성시켰나?
차승우 아주 적극적으로 밴드에 합류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의지도 좋았고, 무엇보다 요즘은 드문 중저음의 보이스라는 점에서도 매력을 느꼈다.

훈조에게 물어보겠다. 왜 더 모노톤즈가 하고 싶었나?
훈조
아까 형이 얘기한 중고 악기 거래 사이트 ‘뮬’에서 글을 봤다. 대부분 뭐 오아시스의 어떤 곡을 준비해달라는 시시한 얘기를 하는데, 그런 말 없이 데이비드 보위와 이기 팝을 언급한 점이 좋았다. 올린 사람 아이디를 클릭하면 그간 그 사람의 매물을 볼 수 있는데 취향이 굉장한 거다. 고색창연한 액세서리를 팔고 있었다. 하하. 이런 느낌을 간직하고 이런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이트 성향 자체가 헤비메탈 하는 사람끼리 어울리는 분위기인데, 여기서 데이비드 보위나 이기 팝을 언급하면 타깃이 좁혀들 거라고 예상했다. 마침, 저 친구가 걸려든 거다. 이런 친구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최욱노 음악인의 풍물시장 같은 곳에서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냈다는 게 나도 신기하다.
차승우 나름 홍대 신에서 20년을 보냈는데 보컬을 찾다 못해, 인터넷에 구인 공고를 올렸다는 것도 나에겐 남다른 의미다. 다들 나에게 “형,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세계 속의 보컬리스트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컸다. 이 친구도 기본적으로 신사지만 나름 ‘크레이지’를 가지고 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 <울트라 젠틀맨>이다.
차승우
처음에 우리 밴드는 이름 없이 시작했다. 그러다 이름을 제대로 만들고 싶어서 여러 후보들을 거론했는데 초반에 잠깐 언급한 이름이 울트라 젠틀맨이었다. 몰락한 귀족이라는 이름도 고민했었는데 최종적으로 더 모노톤즈가 됐다.

차승우는 홍대의 터줏대감이다. 홍대의 흥망성쇠를 직접 목격한 셈인데.
차승우
꽤 긴 시간이었다. 그간 한 번도 음악 하는 것이 편하고 좋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꺾일 만큼 힘든 적도 없었다. 몇 년 하다 때려치우는 사람, 때려치웠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 다른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 음악 하는 사람. 다양한 친구들을 많이 본다. 따지고 보면 밴드 음악이, 음악 신 자체가 주목받아서 수면 위로 올라온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말, 인디라는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엔 새로운 것이었으니 좀 시끌벅적했다. 지금은 거품이 많이 빠졌고 그래서 이제부터 진솔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뮤지션이 나오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홍대, 강남역 등 젊은이가 많이 다니는 길목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수가 되고 싶다는 사람도 많고.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서 뭘 하는 걸까?
차승우
록 음악이 본연의 키워드, 서브컬처 코어가 거세된 채로 스타일만 들여온 것이 폐단 같다. 정말 중요한 걸 들려주고 록 음악 본연의 매력으로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불안정한 시기를 거치는 요즘 10대가 록 음악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하도 유행이 빨리 돌다 보니 그들에게 록의 매력을 전달하기가 점점 힘들다.
최욱노 록 밴드도 얼마든지 힙한 문화일 수 있는데, 대중에게 많이 미치지 못하니까 아쉽다.

새 앨범에 대해 ‘의식의 흐름을 담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는 무엇인가?
차승우
희로애락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루에도 한 가지 감정만 느끼며 살진 않는다. 기쁨도 느끼고 쾌락도 느끼고 처연한 정서가 혼재돼 있다. 3년 동안 만든 앨범이라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담고 있다. 항상 힘들지 않았고 항상 즐겁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이야기다.

더 모노톤즈의 공연장 분위기는 어떤가? 이제 축제 시즌이다.
최욱노
요즘엔 베이스 치는 객원 멤버 하선영까지 넷이 굉장히 사이좋다. 그런 분위기가 무대에서도 드러나 따뜻한 공연을 만들고 있다.
훈조 내가 합류한 시점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초반엔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 찍고 맥주 사러 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요즘엔 노래도 같이 따라 부르고 몰입하는 분위기라 기분이 좋다.

시대가 변해서 사람들이 록을 즐기는 방식도 변했다. 록에 인생을 걸기보다 패션처럼 가볍게 소비하기도 한다. 더 모노톤즈의 음악은 어떤 식으로 즐겼으면 하나?
차승우
우리가 의도한 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음악을 듣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나 역시 어떤 노래를 듣고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삶에서 아주 짧은 몇 분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고무되는 기분을 느끼길 바란다.
훈조 라이트 리스너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록 음악의 속성 중 하나도 비트의 힘으로 몰아가는 건데, 드라이브할 때 신나는 용도로 소비돼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어렵게 완성된 밴드다. 이왕이면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차승우
일단 우리는 해산하면 절대 안 된다. 우리끼리 공유하는 것이 많아지고 할 얘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게 고스란히 음악에 반영될 것 같다. 얼마 전에도 숙회를 먹다가 구상한 것이 있다. 노래 한 곡에 삶을 투영하자는 거다. 사람이 하루 일상이라는 게 보잘것없지 않나. 기분이 괜찮은 날이 있는가 하면 아무 생각이 없는 날도 있다. 그런 기분을 한 곡에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여러 곡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곡으로 이어지고, 이런 걸 생각하다 보니 교향악 수준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꼭 완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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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유웅열이 입은 라이더 재킷은 페더딘 인 펄, 팬츠와 슈즈는 모두 자라 제품. 이이언이 입은 회색 수트와 티셔츠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컨버스 제품. 송인섭이 입은 수트는 시스템 옴므, 슈즈는 컨버스 제품. 조남열이 입은 베스트·셔츠·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컨버스 제품. 이하윤이 입은 블루종과 오픈칼라 셔츠는 페더딘 인 펄 제품.

(왼쪽부터) 유웅열이 입은 라이더 재킷은 페더딘 인 펄, 팬츠와 슈즈는 모두 자라 제품. 이이언이 입은 회색 수트와 티셔츠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컨버스 제품. 송인섭이 입은 수트는 시스템 옴므, 슈즈는 컨버스 제품. 조남열이 입은 베스트·셔츠·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컨버스 제품. 이하윤이 입은 블루종과 오픈칼라 셔츠는 페더딘 인 펄 제품.

여전히, 못 같은 음악 못(Mot)

흐드러지며 일렁이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밴드 못이 만들어내는 사운드엔 나의 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 한없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 때문에 이들의 음악을 ‘우울하다’거나 ‘몽환적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도 모르는 내 마음의 결을 보여주면서 색다른 방식으로 위로를 건넨다는 점이다. 감성의 영역인 음악을 이성의 영역으로 소환해 차갑고도 이질적 사운드를 구현하는 것. 이것이 못의 출발점이었다. 이들의 위대한 탄생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컬을 맡은 이이언과 Z.EE.가 결성한 2인조 밴드는 ‘명문대 이과생’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치밀하게 계산된 기계적 사운드를 들려줬다. 데뷔 앨범 <비선형(non-linear)>(2004)은 그해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을 안았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참신함과 재치 있는 실험 정신의 결과였다. 두 번째 앨범 <이상한 계절>(2007) 역시 2008년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 음악 신에 다양함을 불어넣은 공을 인정받았다. 이후 못은 행방이 조금 묘연해졌다. 2008년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한 것. 2011년 이이언이 솔로 앨범을 발표했지만 그래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8년이 흘렀다. 프런트맨 이이언을 주축으로 조남열(드럼), 이하윤(피아노, 신시사이저), 송인섭(베이스), 유웅렬(기타)이 뭉쳐 5인조로 거듭났다. 더 강력하고 혁신적인 사운드로 여전히 ‘못’ 같은 음악을 들려준다.
 

다행히 음악보다는 훨씬 밝은 사람들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이이언
음악은 심연에 있는 어떤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 심연을 일상에까지 꺼내놓으면 나 스스로도 힘들고, 사회생활도 힘들어진다. 어떻게 보면 음악으로 그 내면을 배출해내기 때문에 이런 밝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같다.
이하윤 이언이 형은 작업실 밖으로 어두운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우리 넷이 나가고 난 다음에 작업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하.

무려 8년 만의 새 앨범이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새 멤버도 합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못’다운 음악을 들려줘야 하는 것이 어려웠을 텐데?
이이언
들었을 때 ‘아, 이건 못의 음악이구나’라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큰 과제이자 부담이었다. 지난 8년 동안 트렌드를 떠나서 사람들이 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20년대 초기 사운드와 지금의 사운드가 전혀 다르듯이, 못이 1집과 2집을 냈을 때와 사운드가 많이 다르다. 기술 발전에 따른 변화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했다. 못의 음악은 관습을 비트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관습적으로 익숙한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바뀐다. 익숙한 것의 흐름을 간파해 새로운 음악에 반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기존의 못과 다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생겼다.

5명이서 ‘못’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낸 지 4개월 정도 지났다. 같이 활동해보니 어떤가?
송인섭
처음엔 마냥 설레었고 지금은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 행보에 대한 고민도 많아진다.
유웅열 일단은 좋다. 많이 고민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음악을 하는 밴드를 같이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조남열 이언이 형은 혼자일 때에 비해 수입이 5분의 1로 줄었을 텐데 이런 과감한 결정을 해줘서 고맙다. 하하.
이하윤 이언이 형,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전에는 집에서 혼자 작업을 하다 보니 외로웠는데, 다 같이 만나서 사는 얘기 나누는 게 참 좋다.

못의 시작은 2004년이었다. 지금이 2016년이니까 12년이 흘렀다. 그때와 지금, 음악인으로서 가장 크게 체감하는 변화는?
이이언
대중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의 변화가 가장 크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예전처럼 좋은 음악을 파고들고, 찾아 듣는 문화가 사라졌다. 스트리밍 사이트의 톱 100을 듣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니까. 그때가 좋고 지금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시대 흐름인 것 같다.
이하윤 상아 레코드나 향 레코드에서 1만5천원, 2만5천원 주고 외국 뮤지션의 CD를 살 때는 뽑기 하는 심정이었다. 미리 들어보고 사지 못하니까 앨범 커버를 보고 사는 것이다.
유웅열 음악을 듣는 자세가 달라지니까 여러 가지로 변할 수밖에 없다. 막상 들어보니 별로라 느껴지더라도 내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애착을 갖게 된다. ‘처음이라 그렇지 자꾸 듣다 보면 좋은 구석이 있을 거야’라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하하. 요즘엔 내 귀에 별로인 음악은 가차 없이 건너뛴다.

못의 팬은 음악을 더 찾아 듣고 파고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이언
우리도 그런 분들을 염두에 두고 음악 작업을 한다. 음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사람이 아니면 못의 음악에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못의 사운드는 확실히 새롭다. 그렇데 새로움과 낯섦은 종이 한 끗 차이다. 새로움만 추구하다 자칫 괴상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이언
못의 음악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도 바로 그것이다. 이상하고 괴상하면서 새롭기만 한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대중에게 의미 있는 새로움을 추구한다. 분명 처음 듣지만 친근한 지점을 만들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다. 반대로 되게 익숙한데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풀타임 뮤지션’으로 살기 힘든 때다. 실제로 다른 일을 병행하는 멤버도 있다고 들었다. 음악인이 음악만으로 잘 먹고 잘살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이이언
스트리밍의 수익 분배가 너무 비정상적이다. 아마 미국이라면 집단 소송을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에 의지하는 거대한 조직이 너무 많아서 계속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 같다.
조남열 그런데 음악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집단행동에 취약하다. 영화인은 곧잘 하는 것 같은데.

밝고 희망찬 긍정을 노래하는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많은 사람들이 못의 음악에서 위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왜일까?
이이언
‘내가 지금부터 너를 위로해주겠다’는 인위적인 방식으로는 위로할 수 없다. 위로를 예쁘게 디자인하는 방식은 우리와 맞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 내면의 복잡한 감정, 슬픔과 모순 같은 혼란스러움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누군가 내 마음을 대신 헤아려준다’는 느낌을 받고 거기서 위안을 얻는 게 아닐까 싶다.
송인섭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나? 그런 맥락의 위로와 위안인 것 같다.

함부로 약속했다가 또다시 양치기 소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후 어떤 활동으로 채워나갈 계획인가?
유웅열
올해 연말까지 계획이 차근차근 잡혀 있다. 서울재즈페스티벌과 지산 밸리록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 등 공연이 많다.
이하윤 하반기에 접어들면 슬슬 다음 앨범 준비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조남열 너무 놀라지 마라. 마음의 준비를 오랫동안 하겠다는 의미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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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CREDIT INFO

EDITOR 서동현
photography 김영훈
Stylist 권인경,Pandawhale, 진영
Hair & Make-Up 조영자

2016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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